우리는 종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와도 종의 계약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악의 종입니다. 우리의 더럽혀진 욕구와 죄악은 우리를 외길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 쇠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 하지만 죄인들에게 이 자유는 도리어 구속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더 구속 시키기만 합니다.
우리가 찾는 보물은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아이와 귤을 좋아하는 아이가 시장에 가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바라보듯이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하는 이가 그에 반대되는 것을 찾을리가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도 세상과 물질을 더욱 사랑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또한 나에게 나름의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냥 그런 줄 알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갈수록 더욱 죄와 욕구의 종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마치 담배를 처음 피운 아이에게 담배를 멀리하게 설득하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벌써 십수년간 담배에 길들여져 온 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욕구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온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은 원하시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우리의 구속을 끊어내시고 우리를 구출해 내실 것입니다. 마치 모이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셨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의 선택은 유효합니다. 구원을 위해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하지 않으려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끌어내는 모든 과정은 하느님이 준비하셨습니다. 남은 일은 우리의 결단인 셈이지요. 가장 간단한 부분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으려 합니다. 즉, 이집트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이집트에는 씹을 고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천한 종인 주제에 하느님을 비난하고 심판하려고 드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불쌍하지만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리석음은 한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아오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볼 수 있는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이 쇠사슬을 끊고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 하지만 죄인들에게 이 자유는 도리어 구속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진정한 자유의 가치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더욱더 구속 시키기만 합니다.
우리가 찾는 보물은 우리의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아이와 귤을 좋아하는 아이가 시장에 가서 제가 좋아하는 과일을 바라보듯이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좋아하는 이가 그에 반대되는 것을 찾을리가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도 세상과 물질을 더욱 사랑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표현을 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또한 나에게 나름의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상태입니다. 그냥 그런 줄 알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갈수록 더욱 죄와 욕구의 종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마치 담배를 처음 피운 아이에게 담배를 멀리하게 설득하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벌써 십수년간 담배에 길들여져 온 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욕구에 너무나도 길들여져 온 셈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그분은 원하시는 걸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우리의 구속을 끊어내시고 우리를 구출해 내실 것입니다. 마치 모이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셨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의 선택은 유효합니다. 구원을 위해 문지방에 양의 피를 바르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하지 않으려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끌어내는 모든 과정은 하느님이 준비하셨습니다. 남은 일은 우리의 결단인 셈이지요. 가장 간단한 부분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으려 합니다. 즉, 이집트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이집트에는 씹을 고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천한 종인 주제에 하느님을 비난하고 심판하려고 드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불쌍하지만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리석음은 한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고 또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돌아오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볼 수 있는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