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을 왜 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성을 찾아 나아가면서 식별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뜨고는 그 ‘지식’만을 훔쳐다가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지혜로운 이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원칙을 망각한 채로 영적 지식만을 끌어당기려 하니 결과는 오히려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식별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별의 지식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고 이런 저런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식별을 통해서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도움을 제공하고, 그리고 공연한 노력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이가 필요한 도움을 얻게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식별은 자신의 능력치를 높여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서게 도와줍니다. 하느님 앞의 위치를 올바로 깨닫고 모든 이에게는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애덕의 행위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을 통해서 마치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지혜가 없는 사람을 다루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받아들이는 이들의 자유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식별의 능력을 타인을 재단하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쓰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식별을 할 자격 자체를 잃는 셈이고, 그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식별은 참된 사랑의 도구입니다. 식별은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식별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식별의 지식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고 이런 저런 판단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식별을 통해서 우리가 내어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도움을 제공하고, 그리고 공연한 노력을 허비하지 않고 정말 필요한 이가 필요한 도움을 얻게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식별은 자신의 능력치를 높여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서게 도와줍니다. 하느님 앞의 위치를 올바로 깨닫고 모든 이에게는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애덕의 행위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을 통해서 마치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지혜가 없는 사람을 다루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받아들이는 이들의 자유가 배제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식별의 능력을 타인을 재단하고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 쓰려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식별을 할 자격 자체를 잃는 셈이고, 그에게는 진정한 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식별은 참된 사랑의 도구입니다. 식별은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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