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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처음 그림이라는 것을 그릴 적에 저는 연필과 종이, 색연필과 크레용 정도 밖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여러가지 재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반복해서 그리면서 도구의 필요성도 덩달아 늘어가게 된 것이지요. 연필의 종류가 그 강도에 따라서 서로 다르고 그 쓰여지는 감촉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아가 만화를 그리는 데에는 여러가지 부수적인 재료들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펜촉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비단 기성품으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쓸 수도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이 그 세부적인 면에 대한 지식을 더욱 늘려가게 만든 셈이지요.

영성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좋고 나쁜 것’만을 구분할 줄 알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좋은 것은 왜 좋고, 나쁜 것은 왜 나쁜지를 더욱 세밀하게 구분하게 되지요.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왜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지도 조금씩 이해해가게 됩니다. 사람은 왜 분노하고, 슬퍼하며, 참된 기쁨이라는 것이 왜 육체의 쾌감과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분류를 인식하고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하게 되면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작되고, 나아가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시작되는 셈입니다. 전에는 그저 껍데기로만 세상을 인식하다가 점차 그 내면에 숨겨진 것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세상을 순진 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본질을 꿰뚫어보게 되고, 이전에 가치를 두던 것에서 마음을 멀리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얼마 간은 이상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지요. 이러저러한 일에 기뻐하고 슬퍼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크게 반응이 없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하찮게 보는 일들에 더욱 비중을 두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히 다른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세상 사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내면은 이미 변화되고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더는 껍데기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순간 순간에 충만한 삶을 유지해 나가지요. 하지만 세상의 성공이 목마르고, 부귀 영화와 미모, 명예와 권력에 눈이 먼 자들은 이런 이들을 알아볼 재간이 없습니다. 여전히 연필과 종이로만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미술재료의 세밀한 구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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