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1-32)
날이 흐릿할 때에 벽에 마주서서 손바닥을 올려보면 그림자고 빛이고의 경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강렬할 때에 손바닥을 올리면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뚜렷해집니다.
흐릿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내면에 그닥 드러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가슴을 찌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자신의 어두운 삶에 아픔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반면,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 별달리 잘못한게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어두움을 더욱 굳혀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나 의롭고 떳떳할까요? 주일미사를 나오고 때맞춰 판공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나 하느님 앞에 떳떳한 일일까요? 혹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은 것만 생각하고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는 아예 고려의 대상에도 넣지 않는 건 아닐런지요?
날이 흐릿할 때에 벽에 마주서서 손바닥을 올려보면 그림자고 빛이고의 경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빛이 강렬할 때에 손바닥을 올리면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뚜렷해집니다.
흐릿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내면에 그닥 드러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가슴을 찌르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면 자신의 어두운 삶에 아픔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반면,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 별달리 잘못한게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어두움을 더욱 굳혀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나 의롭고 떳떳할까요? 주일미사를 나오고 때맞춰 판공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나 하느님 앞에 떳떳한 일일까요? 혹시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지은 것만 생각하고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는 아예 고려의 대상에도 넣지 않는 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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