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맛있는 음식, 좋은 집, 아름다운 경관, 즐거운 시간… 참으로 다양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것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들입니다. 어제 배고플 때 먹은 라면은 오늘 갈비를 먹고 다시 쳐다보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맛있게 먹는 라면은 내가 맛있는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엉뚱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뒤돌아보면 내가 부여했던 그 의미들이 전혀 정반대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는 크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정말 재미있었던 놀이였지만 그건 내가 그 놀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을 뿐, 실제 그 놀이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활동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를 분별해 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우리의 삶의 순간들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신앙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걸까요?
하느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자격이 있고, 우리가 시간을 헌신할수록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보다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론 세상도 하느님이 부여한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만 그 모든 가치를 내어주신 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세상에만 탐닉하는 것은 의미없는 활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의 본질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요.
좋은 집이 좋은 이유는 그 안의 식구들이 오손도손 살기 때문이지 방이 넓어서 좋은 게 아닙니다. 좋은 집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음식이라는 것은 먹는 이가 굶주려 있고 함께 먹는 이와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지 음식의 값이 비싸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자연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직행 열차를 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안에서는 전혀 엉뚱한 모습을 드러내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 재밌다 하는 것에 초연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것 안에서 조금씩 하느님을 발견해 나가곤 하지요.
모든 것의 근본을 잊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근본으로 해석하는 사람, 그래서 늘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소유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늘리려고 하고 그래서 늘 탐욕에 가득하며 그 이면으로 불만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모든 이들의 찬사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고 하느님에게 감사하며 가진 것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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