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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축복식

아이가 죽은 지 겨우 2주가 지났을 뿐입니다. 제 본당 구역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시내 본당의 잘 사는 부자동네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번 어느 장례식을 치르러 급하게 공동묘지를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처 사제를 부탁하지 못해서 제가 땜빵으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곳을 담당하던 자매가 제가 거기에서 한 강론을 듣고서는 저와 이 가족을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저에게 전화를 걸어 제발 이 가족을 영적으로 도와 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지주의라는 교회 규정에는 어긋나는 일이라고 가능하다면 본당 신부님에게 부탁하라고 했었지만 이 자매는 계속 사정을 했고 결국 저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검문소를 지나(잘 사는 동네라 출입을 통제하는 검문소가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별달리 할 말은 없었습니다. 겨우 5살 된 아이를 사고로 잃은 부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말문을 열어야 했습니다.

- 아이는 잘 쉬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사실 하나는 아셔야 합니다. 왜냐면 아이는 어려서 무죄하고 순수하며 지금 부모님이 실의에 빠져 계신 이유는 아이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사는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그래서 분명히 천국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고통은 아이가 사고를 당할 때에 바로 근처에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천국에 있다는 걸 강조하고 또 강조 했습니다. 적어도 그부분에서는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이었지요.

- 여러분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실제합니다. 아이는 죽은 게 아닙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다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뿐이지요. 여러분은 부모님으로서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세상은 실제로는 비가시적인 세계로 인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한 아이에게 아주 값비싼 장난감을 사다 줄 수 있지만 그 사다주는 목적이 아이가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함이라면 그 장난감에는 그 어떤 애정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시적인 것만을 전해주면서 전혀 마음을 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지요. 저는 이 자리에 여러분들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전화를 받고 교회가 규정상 허락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인 셈이지요.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행동은 지극히 미약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내적인 것이지요. 제가 하는 축복의 행위, 위로의 행위 안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몸뚱아리는 때가 되면 죽게 되고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살아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아이를 사랑하고 있고 아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겉으로 그것을 느낄 수단이 없을 뿐이지요.

장시간 동안 부모를 위로했습니다. 제 지식에서 나오는 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던 축복식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모여있던 가족을 축복하고 아이가 죽은 곳으로 가서 성수를 뿌려 주었습니다. 아이는 집안에 있던 실내용 엘리베이터에 목이 걸려 질식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장소를 오늘 처음 만난 제가 봐도 마음이 착잡한데 그걸 지켜본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축복식을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거듭 강조를 해 주었습니다.

- 아이는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현재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실의에 빠져있는 동안 지금 현재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아이의 8살 짜리 언니가 있었습니다.) 저 아이를 보고서 힘을 내세요. 저 아이도 마찬가지의 사랑을 필요로 하니까요. 부모님이 계속 슬퍼하기만 한다면 저 아이도 슬퍼지게 되니까요.

부모님은 고맙다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내미는 돈을 거절하고 다니시는 본당 사회복지비로 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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