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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

하느님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물론 가장 큰 주도권을 쥐신 분은 하느님이시지요. 하느님께서 의도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하느님은 각자의 개인의 응답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각 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각 개인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철저히 봉사하시는 분이시지요. 이는 마치 회사의 사장님이 자신의 회사를 통해서 이윤을 뽑으려는 게 아니라 직원들이 행복해지도록 직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며 직원들이 성실히 일하기를 인내롭고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물론 수많은 회사들이 이를 표방하겠지만 실제로 이윤에 대한 그 어떤 욕심도 없이 그 일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회사라는 것은 기본 이윤을 얻기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하느님은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이윤이 바로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이들의 참된 행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기는 힘든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뜻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는 중에도 우리를 쉽게 내치시지 못하고 또 기회를 주시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마치 무능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일 집구석에서 내가 방을 어지르기만 해도 어머니에게 등짝을 얻어맞아 그 피드백을 얻게 되는데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 자신의 피조물의 엇나감 앞에서도 그것을 그 즉시 처벌하지 않으시니 우리의 무지함은 그분을 마치 없는 존재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실 그러하십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이라는 것이죠. 하느님은 이 지상에서는 우리의 회개와 뉘우침을 위해서 열심히 기회를 제공하시는 자비를 드러내시지만 훗날 우리가 마주해야 할 ...

성장

물론 대부분은 스스로 클 생각조차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가 생각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한 영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실 때에 그 영혼에게 ‘시련’이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 영혼이 쉬거나 뒤로 물러서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그때마다 ‘네’라고 그 시련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키워 나갑니다.  물론 때로는 ‘아니오’를 외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느님은 인내로이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그 영혼이 사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계산보다는 하느님의 분별이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하느님의 부르심보다는 우리 인간의 여러가지 현실적 환경에 기울고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오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길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예를 외치고 응답하는 사람과 아니오를 외치고 머무는 사람들이지요. 때로는 누군가가 사제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고 수도자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이 나뉩니다. 되고자 하는 사람,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람은 역경이 다가와도 ‘예’를 외치고 난관을 극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또 자신만의 새로운 부르심이 다가옵니다. 응답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은 멈추지 않습니다. 또 새로운 과제를 내어주시면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리로 나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더 큰 기쁨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지상에서는 거의 주어지지 않고 영원 안에 마련된 참된 기쁨입니다.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들어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들어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어야 하는 과업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 앞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분별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마태 7,15-16) 이리들도 옷차림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옷차림은 지극히 선한 외양으로도 차려 입을 수 있지요. 하지만 속내는 감출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결국 게걸 든 이리들인 것이지요. 우리가 입을 수 있는 옷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도 입을 수 있습니다. 속에 아무리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어도 우리는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넘어오게 만들 수 있지요. 결국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물론 무엇이 열매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역시 의미없는 일이 되겠지요. 열매는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내는 일의 결과물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일치, 평화, 사랑, 인내, 겸손, 희생, 봉사, 절제, 친절, 선행과 같은 일들입니다. 참된 예언자들은 본인들 스스로 이런 열매를 맺고 다른 이들도 이런 열매를 맺도록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 욕구는 자신들의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고 결국 이런 개인의 탐욕스러움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과 늘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주변이 시끌시끌하게 되지요.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추진력, 즉 엔진을 지니고 있더라도 분별력이 없으면 핸들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엔진을 단 차는 어딘가에 처박아 버리게 되고 모든 것을 망가뜨리게 될 것입니다.

신앙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구

신앙은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 신비는 꼭꼭 숨기려고 신비가 아니라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마치 대학생이 쓰는 교재를 들고 있는 어린이와 같지요. 하지만 그 어린이는 자라게 되고 나중에는 대학생이 되어서 그 교재를 읽을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신비는 더는 신비가 아닌 것이 됩니다. 교회는 신앙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꼭 숨기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신앙 안에서 충분히 자라서 얼른 그것을 알아내고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도와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에 신앙의 신비가 그 신비를 지닌 이들(혹은 심지어 지니지도 못한 이들)의 손에 꼭꼭 숨겨져서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모습이 관찰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교회는 신비를 잘 간직하고 올바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그 직분 자체를 무시하고 까내리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교도권을 존중하고 거기에서부터 생명의 말씀의 풀이가 다가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개개인에게서 일어납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를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쓰려는 욕구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가르침을 하느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을 혹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면들을 짚어 보자면, 신앙 생활을 인도해야 하는 이가 그것을 잘 모르는 초보자에게 은근히 으스대고 싶은 마음으로 신앙 생활에 대한 지시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본질은 그 대상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인데 무언가 으스대고 싶은 사람이 가르치는 신앙생활은 굉장히 어렵고 딱딱하고 초보자가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힘든데 그 선배는 열심히 하는 걸 보고 그 선배를 ...

다른 이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선별

세상이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더는 예전의 구태의연한 것들이 먹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깨어났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것들이 공헌을 했지만 그 가운데 이 ‘인터넷 미디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방식을 알려면 그 비법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서 바닥부터 기어야 했습니다. 궃은 일부터 하면서 서서히 어느 정도에 위치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그 수준의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서 여간해서는 내부에 있는 요소들이 터져나오거나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안정성 있는 제도가 운영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신이 알게 된 소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것을 아는 이들의 집단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흐르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고 그에 따라 여러 면에서 그러한 것들을 점검할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는 꽤나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더는 숨겨진 것이나 감추어진 것이 없게 되었고 오히려 역으로 멀쩡한 것도 때로는 지나치게 파고드는 세상이 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때로는 상처가 아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고 시간을 두어야 하는 것까지도 다시 파고들어서 상처를 더욱 벌리고 사태를 극단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폐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올바로 인지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보와 소통의 도구를 올바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가르침과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양질의 컨텐츠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어디에 참된 빛이 있는지를 올바로 분간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우리의 눈과 귀로 쑤셔넣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무턱대고 모든 것을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을 올바로 분별해서 찾아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아이(마진우 지음)

동네 꼬마아이가 우물 근처에서 놀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타지역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우물에서 건져 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급한대로 자신의 옷이라도 우물 곁의 기둥에 걸치고 그 옷을 잡고서라도 내려가서 아이를 구해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웃통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옷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이 말을 합니다. “여보시오, 이 백주대낮에 우물가에서 무엇하는 짓이오?” “우물에 아이가 빠졌습니다. 얼른 건져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르신이 곰방대를 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시오. 우물에서 뭔가를 건질 때는 그렇게 건지는 게 아니라오, 도르래라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있는데 그걸 써보시오.” “좋습니다. 그걸 써보겠습니다. 헌데 그것은 어디 있고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동네 이장님 댁에 있는데 가서 사용하게 해 달라고 허락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 사람은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동네 이장님에게 도르래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이장님이 의심간다는 눈초리로 말을 합니다. “이 도르래는 스무근 이상 무게가 나가는 것이 물에 빠졌을 때에 사용하는 용도입니다. 지금 물에 빠진 것이 스무근이 넘습니까?” “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이 동네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흠… 그건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이 물건은 스무근 이하가 되는 일로는 써본 적이 없소이다.” “어르신, 지금 물에 빠진 아이가 몇 근이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그 아이를 얼른 구해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장은 망설이기만 합니다. 그것을 내어 주었을 때에 동네 사람들이 훗날 공연한 일에 중요한 도르래를 내어 주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여 도르래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이장에게 도르래를 내어 달라고 사정을 하던 그는 이대로는 안되겠...

산골 마을로 가는 버스(마진우 지음)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콜롬비아의 험한 산길을 버스 한 대가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습니다. 과묵해 보이는 운전 기사 아저씨와 자리에 앉은 산골주민들이 있고 또 도시에서 친지를 찾아가는 이들도 함께 탑승해 있습니다. 산 중턱을 올라서자 안개가 자욱합니다. 그러자 외지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합니다. “이봐요, 기사 아저씨 지금 우리는 산을 올라가는 중이에요. 헌데 이렇게 시야가 가리워져 있으니 안개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갑시다.” 하지만 기사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주민들도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안개는 더욱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외지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합니다.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어요. 기사 아저씨. 보시라구요. 지금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잖아요. 얼른 차를 세우라구요!!!!”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도리어 더 속도를 냅니다. 기사 아저씨는 운전대에 올린 두 손을 꼭 쥐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입니다. 주민들의 얼굴에서도 비슷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안개 지역을 뚫고 달빛이 환한 지역으로 나왔습니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기사 아저씨가 입을 엽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통과했습니다.” 그 순간 주민들의 입에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외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할머니가 입을 엽니다. “이보슈. 저 기사는 우리가 가고 있는 산골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그만큼 길을 아는 사람은 없지요. 헌데 얼마 전부터 게릴라들이 주민들을 습격해서 약탈을 하곤 하는데 우리가 지나온 저 안갯길이 그들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이지요. 거기에서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는 순간 그 버스는 약탈을 당하고 게릴라들의 총에 죽어간 사람도 숱하게 된다오. 하지만 우리 마을 주민들은 아직까지 그 약탈을 당해본 사람이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 기사가 ...

봉사자

회사라는 곳은 이윤을 내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여러가지 인적 자원을 활용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고용한 인력에게 나누어주면 서로 쌤쌤이 맞는 것이지요. 합당한 이득만 잘 돌아간다면 별 탈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조금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어찌보면 굉장히 소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의 근본적인 의도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내어 쏟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봉사자가 모여들진 않습니다. 봉사자가 모여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 부르니까 거기에 응답해서 오는 것입니다. 최초의 봉사에로의 부르심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보내신 외아들이 세상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셨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이 부르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을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근본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이끌리게 되고 부르심을 느끼고 응답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싫다고 느끼고 귀찮고 성가시고 자신을 괴롭힌다고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누룩에 갇혀 있던 사람들, 자신들이 이미 얻게 된 기득권에 만족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귀찮고 성가신 것으로, 심지어는 위험한 것으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숙청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자신들의 ‘이익’과는 맞지 않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전해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

새 자동차

자동차를 처음 사면 잘 나갑니다. 시트에서 새 차 냄새도 나고 아주 기분이 좋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차는 여러가지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기름도 넣고 세차도 해야 하고 윤활유도 갈아야 하며 타이어도 바꾸어야 하겠지요.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 어떤 경우에는 고장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손을 보아야 하겠지요. 그건 차를 소유한 이가 겪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순환고리입니다. 어떤 목적에 의해서 단체가 처음 출범하면 처음에는 비교적 잘 나가는 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목적도 잘 기억하고 있고 의욕있게 공동체를 이끌어나가지요. 하지만 머지 않아 공동체는 삐걱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중요한 건 ‘완벽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삐걱거리는 부분을 수정해 나갈 수 있는 구성원들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벽한 것이라고 시간이 경과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부족함을 누군가는 채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일 위험한 건… 삐걱 거리는 데도 점검을 하지 않고 무리하게 달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너트 몇 번 조이면 될 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큰 사고로 마무리하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때에는 인명에 손상을 입기도 할 것입니다. 새차를 타고 모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고장나서 신경을 써야 하고 수리를 해야 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은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현실을 무시하고 달리던지 아니면 남들이 그 일을 대신 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돌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질 급한 사람들의 원성을 듣기도 합니다. 차를 타고 놀러를 가고 싶은데 생명이 중요하다고 차를 고치고 있는 모습을 견디기 힘든 것이지요. 하지만 훗날 그들은 차를 고치는 이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차를 고치는 것을 가로막은 걸 후회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일들은 역사 안에서 늘 있어왔던 일...

사제생활

사제에게는 누가 찾아올까요? 물론 때로는 기쁨이 가득한 이들이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도 오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뭔가 속상하고 억울하고 풀리지 않고 괴롭고 힘든 이들이 찾아옵니다. 사제는 이런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헌데 이런 만남은 굉장히 내면을 소모하는 만남입니다. 즉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나아가 사랑을 쏟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제는 ‘재충전’이 필요한 때가 옵니다. 바로 이 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사제의 재충전은 두말할 여지 없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제가 다른 재충전의 기회들을 찾거나 구하기 시작할 때에 바로 엇나감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세상 안에서 정당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빈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톨릭 사제는 술, 담배, 고스톱을 즐기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드러나지 않은 곳의 문제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사실 신학교는 바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훈련하는 양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는 힘겨운 일이 될 수 있는 수많은 훈련 과정들이 존재합니다. 기도생활과 학업, 그리고 건전한 공동체 생활의 장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나 여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진중함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말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쏟아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곧잘 다른 이들의 반응을 더 끌어내기 위해서 과장을 섞기도 하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을 더 쏟아놓게 마련이지요. 그러다보면 신학교에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게 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이들이 고지식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과연 술사목은 정당한 것일까요? 우리는 진지하게 고...

조언

여러분 내면에 추상화되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어진 시간,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지요. 헌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나 다 하는 활동’으로 채워 버린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남들이 다 해 놓은 어떤 일의 복제품을 만드는 데에 쓰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활동이라는 것은 남들이 다 추구하고 남들이 다 거기에서 덕을 보려는 활동들을 말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누리고 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그리고 그에게서 파생된 세속적 활동들도 존재합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그 드라마에 대해서 몇시간을 떠들어대고, 같은 제품을 쓰면서 그 제품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그런 활동들에서 마음을 떼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카리스마가 있고 유일함이 존재합니다. 나 말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몫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해 내어야 합니다.  그럼 그 일은 어떻게 찾아 나가는 것일까요?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좋은 전자제품이라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작동시키기 시작하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기계가 아무리 훌륭한 발전기를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가 시동을 걸지 않고서는 전기를 만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다른 질료와는 달리 세상의 것으로 자극받지 않습니다. 영혼은 오직 영적인 재료로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움직이는 자극은 아래로부터 오는 어둠의 자극과 위로부터 오는 빛의 자극이 있지요. 어둠의 자극을 받으면 사람은 증오, 원한, 시기, 분노와 같은 ...

어둠의 영들의 공격

어둠의 영들은 끊임없이 의인을 괴롭힙니다. 그 의인이 더욱 빛에 다가설수록 괴롭힘은 더욱 극심해지지요. 물론 의인은 의인대로 그렇게 심해지는 어두움에 저항할 힘을 키워 나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많은 성인전에는 성인들이 마치 자기 방에서 실제로 악마들과 싸웠다는 듯한 표현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물론 그 가능성을 배제하진 맙시다. 하지만 제가 아는 어둠의 영들은 직접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아주 교묘하고 힘든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건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구체적으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어지럽힘으로써 일어나는 일입니다. 선을 거부하는 이들, 좋은 것을 시기하는 이들, 자신의 부족함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드러내는 이들… 여러가지 공격 수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의인이 하는 활동을 가로막으려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그 의인의 활동은 주변에 빛을 뿌리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어둠의 영들이 괴로운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위대한 섭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이 악을 조장하고 악을 이용해서 의인을 괴롭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적절한 제어를 통해서 의인이 자기 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괴로움을 당하게 놓아 두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의인은 더욱 하느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미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이 영적 전쟁의 생존자를 물색하고 계신 거지요.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에 우리는 그분이 보내시는 구조 헬기에 탑승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명한 판단으로 이 멸망하는 세상 안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텃세와 합당한 충고에 관한 고찰

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얻어지는 지위가 있다. 가족 안에서 나이가 든다거나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경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물론 ‘최소한’의 직무는 수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데 아무리 나이가 들어본들 그 자녀가 아버지를 존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최소한’만 한다면 어떻게든 그 지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지위가 차고 나면 심지어는 그 최소한도 하지 않아도 이미 기득권을 형성해 있기 때문에 안정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만 꿰차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설프게 일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공동선에 위배되는 시도를 하고 함께 추진해 나가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없애 버리고 마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만일 세상이라면 이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힘을 키워 나가서 ‘전복’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여건이 다르다. 교회에는 소위 선해지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최소한은 하겠지라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무책임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성경 안에는 ‘충고’에 관한 내용이 종종 등장을 한다. 즉,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가서 충고해 주기를 성경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에게나 대고 충고를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런 충고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남편이 아내의 엇나간 허영을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아내가 남편의 지나친 세속적 욕구를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 가정 안에는 불화의 씨앗이 자라나 크나큰 나무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을 정립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그릇되이 행하는 걸 시간이 해결해...

나는 삶의 보람을 어디에서 추구하는가?

우리가 보람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행태가 달라집니다. 노동을 마친 후에 그 노동의 가치로 얻은 비용을 써가면서 여행을 다니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사람은 노동하는 내내 괴로움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그것을 마치고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 노동 그 자체에 일종의 ‘가치’를 상정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그날 그날의 노동 안에서 보람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가 자신의 손이 일상적으로 이루어내는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새로운 핸드백을 사거나 아니면 고급진 외식, 여행을 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고 들기 시작하면 크나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목적하는 즐거움을 위해서 일상을 희생하고 소비한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일상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 자녀와의 관계, 남편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녀는 다만 자신이 최종적으로 누리게 될 마지막 기쁨만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처리하고 있는 중일 뿐이니까요. 불행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제가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 그 자체로 기쁨이 되지 않으면 그 사제는 불행합니다. 그 사제는 어떻게든 쉬는 날 놀아볼 생각 만으로 일을 하게 될 테니까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신자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더욱 그 사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사제는 더욱 더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게 되겠지요. 신자들은 부담이고 짐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의 신념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보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처음 느끼는 호흡 안에서부터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오늘 하루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은총의 선물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숨쉬는 순간마다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일을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할 것이고 바로 그런 자신의 열정과 성실성이 앞으로 다가올...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의지의 훈련

깡패들 사이에도 추켜 세워지는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도둑질을 더 잘 한다거나 다른 이들을 더 잘 겁박해서 원하는 목적을 이루거나 하는 이들에 대해서 깡패 집단은 환호를 하게 될 것이고 그를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예를 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고 그가 빛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더한 어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가 지닌 모든 악습들을 떨쳐 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악습’이라고 표현되는 것 자체가 빛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형성된 습관과 악한 습관은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지요. 내가 그냥 코를 긁는 습관을 가지는 것과 긴장할 때면 담배를 몇 갑이나 피워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습관입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데에 길이 든 사람, 술을 과하게 마셔서 건강을 해치고 관계도 망가뜨리는 사람, 담배에 중독이 되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신이 원할 때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 사람… 이런 모든 악습들은 우리 안에서 정돈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습들이 형성되기 전단계를 이루는 내적 요소들도 많습니다. 게으름이라던지(영적 나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게으름을 말합니다.) 성실하지 못하거나 책임감에서 물러나려는 경향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미미한 내적 요소들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훗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선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듣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대로 실행하려고 할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결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제가 앞서 서술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의지...

삶으로 드러나는 증언

증언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참되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도없는 말들을 쏟아놓지만 참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헌데 복음을 전할 기회부터 피하려고 든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고 안전하고 평온한 영역 안에만 머물러서는 복음은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입으로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회개의 기회는 참으로 많이도 주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삶’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에 좋은 강사를 두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수긍하게 되지만 그것을 실제로 살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진정한 나의 응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거기에 응답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구체적인 실천이 될 것입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응답,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다는 응답입니다.

사랑이 다가서게 한다

우리는 돈과 기술이 많은 것들을 단축시킨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실은 ‘사랑’이 그 수많은 것들을 극복하고 단축시킵니다. 한 사제를 찾아오는 일은 신경쓰이는 일이고 성가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마저도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곤 합니다. 오죽했으면 전화나 인터넷으로 성사를 볼 수 있느냐고 물어보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 작정을 하고 누군가를 찾아오는 이유는 그 상대를 신뢰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물건을 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광고를 보지만 그것을 다 사버리진 않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내 마음이 꽂히게 된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고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투자해서 그것을 구입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이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만나야 하고 만나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도 같은 일이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성당의 거리나 신자 재교육의 부재와 같은 이유들이 아닙니다. 실은 ‘사랑의 메마름’이 그러합니다. 아무리 성당이 가깝고 교육의 기회가 많다 하더라도 정작 내 마음 속에 여전히 세상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면 나는 밤 12시에라도 야식집에는 전화를 걸 줄 알면서 정말 내가 보아야 하는 성사를 위해서 사제를 찾아가는 것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이 거리를 단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래야 하늘 나라의 거리가 단축되고 결국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새로운 ‘신심’을 추구하고 아무리 색다른 ‘교회 구조’를 배운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습니다.

위선을 경계하기

때로 어떤 공동체의 나눔의 자리에 참석해보면 ‘아 이렇게 사랑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아름다운 말이 나온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우라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때에 좋은 것을 꺼내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고 당신이 직접 사는 삶을 드러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같은 방식으로 사람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나마 참된 분별을 하려면 ‘와서 보아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태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머지 않아 드러나게 됩니다. 공석에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십시오. 그 사람은 남편에게 신경질적이고 자녀들에게 가시방석을 만들고 있으며 사석에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잔뜩 늘어놓는 나쁜 열매를 맺는 사람일지도 모르니까요.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히 남을 것

사람은 은연중에 자신이 지닌 것을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외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는 통에 순수한 만남이 사라지게 됩니다. 외적인 면모에 집착하느라 정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실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자신이 진정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것, 우리의 순전한 본질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요소들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차적으로 지닌 것, 옷을 비롯해서 학식과 명성 모든 것들은 덧붙여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의 본질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지닌 육체마저도 훗날에는 상실하고 말 대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히 남을 것을 올바로 분별하고 그것을 키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영원히 남을 것이 될까요?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가 추구할 만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물들의 형체라는 것은 ‘빛’이 없으면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해 내는 모습들이 결국 저마다의 사물의 형체를 구성해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 그 자체가 소중하고 그 빛을 드러내는 존재가 중요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영원의 빛이시고 인간은 오직 그 하느님에게서 빛을 받아 그것을 드러낼 때에만 의미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허황함은 계속될 것입니다. 세속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주입시킬 것이고 사람들은 그 흐름에 밀려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부표처럼 헤매이고 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이해하게 된 사람들은 길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의견에 쫓겨 다니지 마십시오. 묵묵히 우리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바로 그 길에 참된 진리가 놓여 있고 우리의 구원과 진정한 행복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

한 여자아이가 아름다움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과 힘을 알게 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의 미모가 그 영향권의 세력 안에 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여자아이는 일종의 ‘유혹’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 미모를 이용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와 그 반대로 겸손하게 처신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아이들의 내면에는 그것을 다스릴 내적 능력이 함양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지닌 외모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고 또 그 실행의 결과물이 자신의 내면에 ‘교만’이라는 형태로 점점 쌓이게 되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어가는 동안 어른들은 이 아이의 내면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해도 아이의 내면의 형성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아이에게 균형감각을 되찾아 주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아이의 내적 성향을 강화시켜 주는 쪽으로 흘러가곤 합니다. 즉 아이의 허영을 채우는 것들을 잔뜩 사주고 또 아이의 외모에 대한 끝없는 칭찬으로 결국 아이가 그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강화하고 도와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 아이는 크는 내내 자신의 미모에 집착하게 되고 또 다른 아이들과 일종의 경쟁 구도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미모가 정점을 찍을 때에, 그 뒤로부터는 끊임없는 좌절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름은 늘어갈 것이고 피부는 본래의 빛깔을 잃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갈수록 절망에 빠져들게 됩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과연 축복일까요? 날이 선 칼은 의사의 손길에서는 다른 환자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강도의 손에서는 흉기가 되어 버리지요. 외적 아름다움도 마찬가지이니 오직 그것을 겸손한 태도로 받아들일 때에, 자신의 외적 아름다움이 미칠 영향과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합...

성사와 자비

우리가 지닌 성사는 고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게 됩니다. 고해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그릇되이 이용하면 ‘모고해’라는 것이 되고 더 큰 죄가 되어 버립니다. 성체성사도 마찬가지로 올바로 참례하고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돌리고 정진해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심지어 중요한 내면의 거스름을 지니고도 모시게 되면 ‘모령성체’가 되고 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당신의 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사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세례 성사를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하느님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바로 그 가르쳐야 하는 주체가 그들을 비난하려고 드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알지만 가톨릭 교회의 풍성한 신앙 유산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따뜻한 시선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이 하느님을 알도록 더 잘 도와줄 수 있고, 또 우리 스스로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을 올바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

하느님에게 영광이 되는 일에 대해서 성찰해 봅시다. 성경 안에는 예수님께서 곧잘 영광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수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광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어떠한 일이 영광이 될까요? 어떤 일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신 가장 완전하신 분께 어떤 것을 돌려드려야 그분께 영광이 될까요? 그것은 단 하나 그분께서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와 연관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을 시작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영광’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조건 십자가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모든 종류의 일들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다만 그러한 일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통상적으로는 ‘십자가’가 뒤따를 뿐이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볼 때에, 내 배우자와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또 보전하려고 할 때에, 우리의 그 모든 ‘선의’에서 나오는 ‘사랑의 행동’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마음을 써서 하느님에게로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에게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거창한 일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일, 하지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쓰면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일들 속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찾아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더 나아질 것이며 더 아름답게 가꾸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