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올라가기만 하면 얻어지는 지위가 있다. 가족 안에서 나이가 든다거나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경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물론 ‘최소한’의 직무는 수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데 아무리 나이가 들어본들 그 자녀가 아버지를 존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최소한’만 한다면 어떻게든 그 지위를 고수할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지위가 차고 나면 심지어는 그 최소한도 하지 않아도 이미 기득권을 형성해 있기 때문에 안정성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 자리만 꿰차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어설프게 일하려고 하면서 도리어 공동선에 위배되는 시도를 하고 함께 추진해 나가서 달성해야 할 목표를 없애 버리고 마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만일 세상이라면 이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만들어지고 힘을 키워 나가서 ‘전복’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하지만 교회는 여건이 다르다. 교회에는 소위 선해지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최소한은 하겠지라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무책임함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성경 안에는 ‘충고’에 관한 내용이 종종 등장을 한다. 즉, 누군가가 옳지 못한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가서 충고해 주기를 성경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아무에게나 대고 충고를 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런 충고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음에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남편이 아내의 엇나간 허영을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아내가 남편의 지나친 세속적 욕구를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 가정 안에는 불화의 씨앗이 자라나 크나큰 나무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가치관을 정립해 주지 않으면, 그들이 그릇되이 행하는 걸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하고 방치해 둔다면 반드시 그 고름은 훗날 터져나오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충고해 줄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올바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며 단순히 자리만 꿰차고 다른 이들의 행동을 저해하는 사람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은 아니다. 일종의 결심이 필요하고, 심한 경우에는 반대를 얻을 각오를 해야 하기도 하는 일이다.
아, 그리고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것 하나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에 상응하는 충고를 하고자 할 때에는 내가 적어도 그 면에서는 안정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데 옆 사람에게 물에 빠졌을 때 이렇게 하면 산다고 충고해 주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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