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대부분은 스스로 클 생각조차 않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가 생각을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한 영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실 때에 그 영혼에게 ‘시련’이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 영혼이 쉬거나 뒤로 물러서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그때마다 ‘네’라고 그 시련에 응답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키워 나갑니다.
물론 때로는 ‘아니오’를 외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느님은 인내로이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미 그 영혼이 사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의 계산보다는 하느님의 분별이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하느님의 부르심보다는 우리 인간의 여러가지 현실적 환경에 기울고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니오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길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예를 외치고 응답하는 사람과 아니오를 외치고 머무는 사람들이지요.
때로는 누군가가 사제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고 수도자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이 나뉩니다. 되고자 하는 사람,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사람은 역경이 다가와도 ‘예’를 외치고 난관을 극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또 자신만의 새로운 부르심이 다가옵니다.
응답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은 멈추지 않습니다. 또 새로운 과제를 내어주시면서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리로 나아오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더 큰 기쁨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지상에서는 거의 주어지지 않고 영원 안에 마련된 참된 기쁨입니다.
좁은 문이고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들어가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들어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들어가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어야 하는 과업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 앞에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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