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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마진우 지음)



동네 꼬마아이가 우물 근처에서 놀다가 그만 우물에 빠졌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타지역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우물에서 건져 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급한대로 자신의 옷이라도 우물 곁의 기둥에 걸치고 그 옷을 잡고서라도 내려가서 아이를 구해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웃통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옷벗는 모습을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어르신이 말을 합니다.
“여보시오, 이 백주대낮에 우물가에서 무엇하는 짓이오?”
“우물에 아이가 빠졌습니다. 얼른 건져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자 어르신이 곰방대를 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시오. 우물에서 뭔가를 건질 때는 그렇게 건지는 게 아니라오, 도르래라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있는데 그걸 써보시오.”
“좋습니다. 그걸 써보겠습니다. 헌데 그것은 어디 있고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동네 이장님 댁에 있는데 가서 사용하게 해 달라고 허락을 받으시면 됩니다.”

그 사람은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동네 이장님에게 도르래를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이장님이 의심간다는 눈초리로 말을 합니다.
“이 도르래는 스무근 이상 무게가 나가는 것이 물에 빠졌을 때에 사용하는 용도입니다. 지금 물에 빠진 것이 스무근이 넘습니까?”
“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이 동네 아이가 물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흠… 그건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이 물건은 스무근 이하가 되는 일로는 써본 적이 없소이다.”
“어르신, 지금 물에 빠진 아이가 몇 근이 되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아는 건 그 아이를 얼른 구해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장은 망설이기만 합니다. 그것을 내어 주었을 때에 동네 사람들이 훗날 공연한 일에 중요한 도르래를 내어 주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여 도르래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이장에게 도르래를 내어 달라고 사정을 하던 그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는 얼른 달려와 우물에 가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아이를 구합니다. 놀란 아이가 웁니다. 그는 아이를 달래주고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갑니다.

알고보니 그 아이는 이장집의 장손이었습니다. 바로 그 도르래가 망가지는 것을 걱정하고 자신의 위신을 소중히 여기던 그 이장집의 장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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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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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고통이자 다른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감소하는 고통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면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외적 활동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아니냐가 이 십자가와의 연계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실 때에 그 일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그 일에서 내가 손을 떼기를 바라실 때에 바로 그 '멀어짐'이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십자가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중점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하나는 바로 나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즉 '십자가'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어떤 일이어야 하고 또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라 수용하기 힘들 때에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고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 '회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욕을 먹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친구가 되십시오.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 가까이 이끌어 가도록 매사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선과 악을 올바로 이해하고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지십시오.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깃들지 않으면 포기할 줄도 알고,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무언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

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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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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