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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의지의 훈련



깡패들 사이에도 추켜 세워지는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도둑질을 더 잘 한다거나 다른 이들을 더 잘 겁박해서 원하는 목적을 이루거나 하는 이들에 대해서 깡패 집단은 환호를 하게 될 것이고 그를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예를 얻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어둠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고 그가 빛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반대로 더한 어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가 지닌 모든 악습들을 떨쳐 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악습’이라고 표현되는 것 자체가 빛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형성된 습관과 악한 습관은 완전히 다른 두 개념이지요. 내가 그냥 코를 긁는 습관을 가지는 것과 긴장할 때면 담배를 몇 갑이나 피워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습관입니다.

누군가를 험담하는 데에 길이 든 사람, 술을 과하게 마셔서 건강을 해치고 관계도 망가뜨리는 사람, 담배에 중독이 되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신이 원할 때면 담배를 피워야 하는 사람… 이런 모든 악습들은 우리 안에서 정돈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습들이 형성되기 전단계를 이루는 내적 요소들도 많습니다. 게으름이라던지(영적 나태가 아니라 실제적인 게으름을 말합니다.) 성실하지 못하거나 책임감에서 물러나려는 경향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미미한 내적 요소들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훗날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선과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듣기에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대로 실행하려고 할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결단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제가 앞서 서술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의지의 훈련인 것이지요. 우리의 의지를 서서히 작은 것에서부터 변화시켜 나가는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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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한 사람은 기본 성정이 선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아닌 것에는 과감하게 아니라고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고통이자 다른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감소하는 고통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면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외적 활동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아니냐가 이 십자가와의 연계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실 때에 그 일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그 일에서 내가 손을 떼기를 바라실 때에 바로 그 '멀어짐'이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십자가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중점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하나는 바로 나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즉 '십자가'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어떤 일이어야 하고 또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라 수용하기 힘들 때에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고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 '회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욕을 먹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친구가 되십시오.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 가까이 이끌어 가도록 매사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선과 악을 올바로 이해하고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지십시오.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깃들지 않으면 포기할 줄도 알고,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무언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

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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