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내면에 추상화되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어진 시간, 허락된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지요.
헌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누구나 다 하는 활동’으로 채워 버린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자유롭게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을 남들이 다 해 놓은 어떤 일의 복제품을 만드는 데에 쓰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활동이라는 것은 남들이 다 추구하고 남들이 다 거기에서 덕을 보려는 활동들을 말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누리고 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그리고 그에게서 파생된 세속적 활동들도 존재합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그 드라마에 대해서 몇시간을 떠들어대고, 같은 제품을 쓰면서 그 제품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식의 활동들이지요. 우리는 누구나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그런 활동들에서 마음을 떼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카리스마가 있고 유일함이 존재합니다. 나 말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몫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해 내어야 합니다.
그럼 그 일은 어떻게 찾아 나가는 것일까요?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좋은 전자제품이라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듯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을 작동시키기 시작하는 ‘전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기계가 아무리 훌륭한 발전기를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가 시동을 걸지 않고서는 전기를 만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아서 그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다른 질료와는 달리 세상의 것으로 자극받지 않습니다. 영혼은 오직 영적인 재료로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움직이는 자극은 아래로부터 오는 어둠의 자극과 위로부터 오는 빛의 자극이 있지요. 어둠의 자극을 받으면 사람은 증오, 원한, 시기, 분노와 같은 것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빛의 자극을 받으면 사람은 사랑, 인내, 겸손, 절제와 같은 좋은 것들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어떤 자극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이든 저든 자극을 피해서 무미건조한 상태로 나의 영혼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육신의 욕구에 내어 맡기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 선택하는 영역이지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냥 육신의 흐름만을 좇는 사람들을 성경은 ‘짐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딱히 악이라고 부를 만한 일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선이라고 부를 만한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호숫가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들이지요. 위대한 누군가를 만나면 거기에 찬사를 던지다가 수가 틀리면 언제라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혼수상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빛의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우리의 영혼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내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에서 우리에게 권하는 수많은 활동들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들이 정말 빛의 자극을 위해서 방향지워져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지요.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활동 보고를 하기 위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채우는 기도와 미사 참례와 같은 일들이 교회 안에는 실제로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분별력을 높이고 여러분 앞에 주어져 있는 수많은 도전거리들을 합당하게 골라내십시오. 본인 스스로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 무턱대고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분별력이 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생겨나게 되고 그 신앙은 결국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르러 길을 벗어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신앙에 대한 거부감이 시작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결국 참된 영양분을 주는 나무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리교사들이 부모의 권유로 교리교사를 하면서 성당 활동을 하지만 결국 신앙에 동의하지 못하고 멀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그 소위 교리교사는 애시당초부터 신앙을 형성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교회의 범주 안에서 ‘교리교사회’라는 이름의 취미생활을 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참된 빛의 자극을 올바로 선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바로 이 실행의 영역에서 실패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찌보면 지극히 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실행은 수십, 수백번의 실패를 통해서 결국 완성되어 가는 것이니까요. 수많은 성인들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좌절하고 고뇌하면서 결국 스스로를 서서히 완성시켜 갔고 그렇게 완성된 이에게는 그 어떤 어려움도 더이상 어려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힘 닿는 대로 가능한 일을 실행해야 합니다. 선을 베풀어 보기도 하고 충고나 조언이 필요한 이에게 다가가 필요한 것을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또 나 자신의 부족함과 오류를 채우고 멈추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해야 합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필름이 끊겨본 사람은 자신의 그런 헛된 행동의 결과물을 끌어안아 다음부터는 그런 행동을 줄일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변에서 목격하다시피 세상에는 그러지 않는 사람들, 즉 그냥 자신이 늘 살던 삶의 범주를 편안하게 유지하려고만 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것을 두고 바오로 사도는 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부탁한 것이지요. 육체적 편안함과 쾌락은 늘 영적 자극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여러분은 그렇게 무미건조함에 젖어 있다가 결국 어둠의 초대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빛을 받아들이고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변해 나갈 때에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도 변할 수 있게 되고 여러분은 결국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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