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라는 곳은 이윤을 내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여러가지 인적 자원을 활용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고용한 인력에게 나누어주면 서로 쌤쌤이 맞는 것이지요. 합당한 이득만 잘 돌아간다면 별 탈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조금 다른 구조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어찌보면 굉장히 소모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의 근본적인 의도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내어 쏟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는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봉사자가 모여들진 않습니다. 봉사자가 모여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누가 부르니까 거기에 응답해서 오는 것입니다.
최초의 봉사에로의 부르심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보내신 외아들이 세상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셨지요. 그리고 그 제자들이 부르심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을 부르고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근본 목적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이끌리게 되고 부르심을 느끼고 응답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싫다고 느끼고 귀찮고 성가시고 자신을 괴롭힌다고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누룩에 갇혀 있던 사람들, 자신들이 이미 얻게 된 기득권에 만족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귀찮고 성가신 것으로, 심지어는 위험한 것으로까지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숙청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자신들의 ‘이익’과는 맞지 않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이들에게는 기꺼이 생명과도 같은 말씀을 전해주셨고 그리고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피해서 다른 고을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을 듣고자 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은 넘쳐났으니까요.
교회는 우리가 부름받은 근본 목적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 근본 목적 안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근본 목적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모든 일이 의미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사랑에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사랑은 봉사라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다른 이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 그리고 아픈 이들을 위해서 다가오는 의사와 같은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 봉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발을 씻어주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서 병자를 치유하는 의사와 같은 존재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바로 그때에 교회의 엇나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