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에게는 누가 찾아올까요? 물론 때로는 기쁨이 가득한 이들이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도 오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뭔가 속상하고 억울하고 풀리지 않고 괴롭고 힘든 이들이 찾아옵니다. 사제는 이런 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헌데 이런 만남은 굉장히 내면을 소모하는 만남입니다. 즉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나아가 사랑을 쏟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제는 ‘재충전’이 필요한 때가 옵니다. 바로 이 때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사제의 재충전은 두말할 여지 없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사제가 다른 재충전의 기회들을 찾거나 구하기 시작할 때에 바로 엇나감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세상 안에서 정당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빈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톨릭 사제는 술, 담배, 고스톱을 즐기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드러나지 않은 곳의 문제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사실 신학교는 바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훈련하는 양성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는 힘겨운 일이 될 수 있는 수많은 훈련 과정들이 존재합니다. 기도생활과 학업, 그리고 건전한 공동체 생활의 장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언제나 여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표현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고 친화력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진중함을 지닌 사람들은 오히려 말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쏟아내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곧잘 다른 이들의 반응을 더 끌어내기 위해서 과장을 섞기도 하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을 더 쏟아놓게 마련이지요. 그러다보면 신학교에서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게 됩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는 이들이 고지식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과연 술사목은 정당한 것일까요?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술사목’이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선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회식에 절제와 더불어 술이 곁들여지는 자리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것은 군더더기 없는 술사목이 되겠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술사목이라는 것은 술을 진탕 먹고 마시면서 취하고 주사를 부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평신도들이 가정에 돌아가서도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목자는 아무리 정돈된 자세로 술을 마신다고 해도 거기 모여든 이들이 모두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그 술자리를 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올바로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일은 아니니 그 가운데 올바른 일, 더 나은 일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과 상반되는 일을 배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양심이 올바로 잡힌 사제라면 당연히 신자들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일들을 갈수록 멀리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를 완성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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