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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살아난 아우 죽어가는 형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아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죽어 있었다는 말일까요? 나아가서 여기 미사를 드리겠다고 모여 앉아 있는 우리는 과연 살아 있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죽어있는 이들일까요? 사람들은 육신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육신의 고통은 즉각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으면 그 즉시 그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증오한다고 해서 그 증오의 기운이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영혼이 탐욕과 이기심에 물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즉각적인 아픔으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신앙을 잃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을 안나오면 도리어 몸이 편해집니다. 참된 신앙인이나 양심에 찔릴까 원래부터 신앙이 없던 이, 즉 성당에 그다지 나오고 싶지 않던 이들은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핑계가 생겼을 때에 오히려 잘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이처럼 육신에 끼쳐지는 해악은 즉각 그 느낌을 알지만, 영혼에 끼쳐지는 해악은 둔감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육신에 집착하고 영혼에 둔감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신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선하게 살아도 악하게 살아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안됩니다.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명이신 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콘센트에 전원이 연결된 전자기기가 작동하는 것처럼 영원하신 분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 영혼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영혼의 본래의 기능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놓여 있는 사람만이 참 되고 진실한 사...

하느님과 화해하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고심할 때가 많습니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부딪히고 싸우고 다투는 일이 흔합니다. 그리고는 '화해'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화해의 선결 작업은 하느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기본적으로 선을 회복한다는 뜻이고 진리와 영원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화해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휴전일 뿐이고 내면에 불씨를 담아 놓은 채로 불이 꺼졌다고 스스로 위안삼는 것 뿐입니다. 언제고 다시 촉발될 싸움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셈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로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내면 속에 진리와 선을 담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 더 참된 것이며 무엇이 더 선한 것인지 알아서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영원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세상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쉽게 화해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내면에 악을 오래 품을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부딪히지만 금세 화해합니다. 그들의 내면이 기본적으로 악에 심하게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다릅니다. 어른들은 악한 의도를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원한, 원망, 앙심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하느님,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을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에 의로움을 추구하는 우리는 의로움을 추구하는 다른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

영적 성장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음식이고 이스라엘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음식입니다. 우리는 거저 얻는 것이 있는 동안에 힘을 길러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력 없이 얻는 음식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음식이 그치고 나면 우리 스스로 양식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양식이 멈추었다는 이야기는 그들 스스로 양식을 마련할 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 안에서 성장한다는 의미는 바로 '영혼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몸은 양식을 먹고 자라고 영혼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데 우리의 영혼 성장기 초반에 우리는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지금 우리 성당에 나오는 예비자들이 그러합니다. 성당에 오면 간식도 주고, 교리도 가르쳐 주고, 내일은 성지 순례도 데려가 줍니다(강론하는 주일 예비자 성지순례 예정). 하지만 이런 보살핌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세례를 받고 나면 예비자 때에 필요했던 관심과 사랑이 멈추게 됩니다. 그때에는 스스로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누가 전화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사를 챙겨 나와야 하고 스스로 필요한 신앙 성장의 기회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기성 신앙인인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보면 여전히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으니 떠먹여줘야 겨우 먹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고해 성사도 판공 때가 되어 보라고 해야 보고, 미사도 의무라는 것을 알려줘야 겨우 오는 식입니다. 스스로 필요에 의해서 고해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주일 미사 외에 미사는 오면 큰일나는 식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교회의 성장 시기에는 별 상관이 없는데 교회의 위기가 닥쳐오면 당장 떠나버리는 것이 일상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 오던 것들이 메말라가면 영혼이 죽어버리고 냉담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총이 내리는 동안, 우리에게 만나가 내리는 동안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스스로 먹을 것을 찾는 신앙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의 여러 봉사 기회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역량...

죄가 뭔지 알아야 없앨 수 있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의로움이고 하느님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음식을 예를 들어봅시다. 좋은 음식이 있고 나쁜 음식이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맛으로 좋은 맛과 나쁜 맛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 독성을 바탕으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음식에 영성적 의미를 더할 수도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위해 음식을 먹는 사람과 하느님 아닌 다른 목적을 추구하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몸을 건강하게 보전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를 나누며 나아가 필요한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는 사람은 말 그대로 하느님을 위해서 음식을 먹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음식을 먹어 건강을 상하게 한다거나 음식 자리에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고 또 누군가를 험담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 시킨다던지, 나아가 이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배만 불리려고 드는 사람이면 이는 하느님 아닌 것을 바탕으로 음식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찾는 이 기본적인 태도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믿고 또 그분이 우리를 선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서 그걸 바탕으로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들은 뭔가 많은 성과를 통해서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한 이 생을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살아갈 뿐입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여주기 위해서 삽니다. 그가 신앙인의 탈을 쓰고 있으면 기도도 보여주기 위해서 하고 미사조차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올 뿐입니다.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얻게 될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추구한 만큼 잃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불행해지고 그런 불행을 혼자만 지니고 있는게 너무 울화통이 터져서 다른 이...

주님의 노력

하느님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영역에서 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멸망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멸망을 피하는 데에 촛점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를 갖습니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에게 오히려 죽음은 기회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양 팔을 벌리고 삽니다. 하지만 어둠을 향해 내려가는 이들에게 죽음은 경고장이 됩니다. 죄지은 상태의 우리가 뉴스에서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영혼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는 경고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가능한 기회를 주는 분이지 부당한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언젠가는 열매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 버릴 것입니다. 다만 그 기회를 최대한 늦추고 계십니다. 죄짓는 이들은 '이래도 아무 일도 없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기회가 선물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지나고 나면 결국 나무는 잘릴 것입니다. 물론 그 기회를 잘 이용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매년의 사순이 이렇게 지나갑니다. 신앙인에게는 얼마나 많은 기회가 선물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모쪼록 그 기회를 잘 써서 빛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투덜거리는 이들

광야의 이스라엘은 영적 여정을 가는 이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됩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이집트와 같은 세속성의 무게에 시달렸으며, 그들처럼 우리도 홍해 바다를 건넌 것처럼 세례를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 왔습니다. 그들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1) 악을 탐냈다. 악을 탐냈다는 것을 그들이 무언가 어마어마하게 사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평범했고 하느님의 만나를 먹고 있었고 날마다 구름기둥과 빛기둥의 안내를 받아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탐냈습니다. 몸은 모세를 따라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성당은 나오는데 사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탐욕스러움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든 말입니다. 2) 투덜거리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투덜거림입니다. 그들은 기쁘게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하느님이 인도하는 여정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연히 이 길을 따라 나왔다면서 자신들을 압제하던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람들은 차라리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주일 미사를 빠져도 마음의 부담도 없을 것이고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투덜댑니다. 이런 이들의 운명은 '파괴자의 손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 그대로 전해집니다. 모쪼록 스스로 서 있다고 착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하느님

모세는 믿는 이였습니다. 당장 거머쥘 수 있는 결실보다 이루어질 희망을 품고 그 약속을 하는 분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을 '아담'의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그 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의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약속은 괴로움의 현재를 바탕으로 주어집니다. 괴로움이 없으면 약속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시련이 있습니다. 바로 그 시련을 바탕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게 됩니다. 현세에만 희망을 두는 이, 즉 현세의 삶을 조금 더 낫게 살기만을 바라는 이는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가 힘들 것이며 얻더라도 또 잃어버릴 운명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없다가 있음을 선물받은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분의 존재를 알고 살아가는 이와 이 분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가는 이의 삶은 천지차이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찾는 사람은 악을 물리치고 선을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과연 어디에서 선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 남은 선이라고는 자신이 느끼기에 좋은 것 뿐입니다. 그래서 돈이 선이 되고 세상의 야욕을 뒤쫓는 것이 선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진정 하느님의 뜻에 맞게 길러지기를 바라기보다 '성공'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의 문턱은 너무나 높아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기 시작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모세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하느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숨길 것이 없고 내면의 생각과 행동의 일치를 보시며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맑은 영혼을 사랑하십니다. 사람은 겉만 봅니다. 그래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며 내면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고 겉으로 있어 보이는 이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은 그분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지극히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알고 있고 그런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자연스럽게 감사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 앞에 보여지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하지만 애써 그 교만을 감추어야 하고 사람들의 평가를 좋게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위선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이 자신의 교만을 그대로 드러내어 버리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에 그들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선한 시늉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이는 기쁨을 느끼기 쉬운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무언가를 잃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다시 돌려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 이들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을까 두렵고 또 자신의 검은 속내를 들킬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즉 돈과 명예 권력을 얻을 때에 쾌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그런 것을 잃을 때에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느님 앞에 서는 이는 자신을 낮추는 이입니다. 반면 사람 앞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이는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는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말을 한다고 생각 중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세분에게 초막을 지어 주겠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좋은 게 있으면 일단 내 소유로 만들어 두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쌓여 있는 욕구가 너무 많아서 그걸 쏟아놓기 바쁩니다. 사실 우리는 타인의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저 타인이 말하도록 잠시 허락할 뿐, 결국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안에 고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드문 일이 되었습니다. 다들 누군가가 이미 한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말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남들이 다 가듯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벌어서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로 살고 있을 뿐일까요? 도대체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그리고 거기에 가 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살아갈까요? 아니면 늘상 신앙은 뭔가 나에게 요구하는 게 많고 나는 그걸 다하지 못해서 불안해 하면서도 혹시 몰라서 신앙에 붙어 있는 것 뿐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말에 귀 기울일 때에 비로소 나 자신도 올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진정한 창조주로서 인간을 가장 원래의 모습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에, 그분이 선택하신 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에 비로소 가장 스스로다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에 앉아서 주변을 잘 관찰해 보면 낮부터 소주를 들이키는 어른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늘상 나누는 대화 주제는 '술'이 됩니다. 맥주와 소주의 비율은 어떻게 넣어야 잘 넘어 간다느니, 왕년에 소주를 몇 병까지 마셔 보았다느니, 한 때 술값으로 수십만원을 낸 적도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곤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심지어 신자들 중에는 술을 두고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들이 신앙으로 건너오면 이런 사순시기를 맞아서 또 자신이 술을 금주한다고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애시당초 마시지 않으면 금주할 것도 없을 터인데 평소에 자신이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사순시기를 맞아서 금주를 한다고 자랑을 늘어 놓습니다. 물론 아예 끊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저 사순시기에 참아서 부활 지나고 더 열심히 마실 작정입니다. 자매님들 중에는 이 시기에 다이어트를 한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소에 절제해서 먹으면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는 걸 두고 엉뚱한 걸 자랑하는 셈입니다. 근본 방향이 틀려먹은 셈입니다. 겉으로는 엄청 열심한 신자인 척을 하지만 결국 그들이 섬기는 것은 자기네 배를 섬기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짐짓 거룩해 보이는 행위로 자신을 꾸미기만 할 뿐,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렇게 살다가 멸망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손이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의 영혼 구원도 이루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본 적도 없고, 기껏 데려온다는게 자주 가는 술집 사장이나 꼬드겨서 신자로 만들어 그 집에 갔을 때에 서비스나 잔뜩 받아 보자는 심산인지라 그런 이가 성당에 들어...

믿음이 의로움이 된다

우리는 '성과'를 통해서 나를 평가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참외를 누가 제일 잘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최종적으로 거두어들인 '수익'을 통해서 평가받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참외를 돌보고 여러가지 농사 기술에 대해서 알아도 수익이 나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형태가 신앙 안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의로움을 그 성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것을 두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 얼마나 많은 봉헌금을 내는지와 같은 것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의로움의 열성을 판단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세 15,6) 하느님은 훗날 아브라함이 될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의로움을 생산한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특정 행위를 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의로움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의로운 분이시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이들이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얻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고자 우리가 믿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유치원 한 켠에 산더미같이 쌓인 모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걸 어떻게 치우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한 유치원생이 다가와서 이 모래를 자기가 내일까지 다 치우겠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 모래가 모두 사라져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 유치원생은 굴착기를 가지고 있는 아빠에게 부탁을 해서 치웠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빠에게 부탁을 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가 자신의 부...

표징을 찾는 악한 세대

사람들은 표징으로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찾아 다닙니다. 믿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믿게’ 만들까요? 그들이 찾아다니는 믿음의 표징은 어떤 것일까요? 하늘에서 십자가 구름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바뀔까요? 태양이 뱅글뱅글 돌면 그것이 표징이 될까요? 이는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합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믿음을 하나의 물건처럼 간주합니다. 그래서 상응하는 가치의 표징이 있으면 믿음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의 거래처럼 돈 될 만한 물건이 있으면 나의 돈을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믿음은 진실한 회개이고 성화의 노력입니다. 복음에서 드러나는 두 가지 예시가 그것입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서 머나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솔로몬 여왕은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요? 솔로몬 임금이 맨손으로 바위라도 쪼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솔로몬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지혜롭게 일을 처리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남방 여왕은 지혜에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현세의 재물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나아가 니네베 사람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뭔가 대단한 표징을 보았을까요? 요나가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렸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는 기껏해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회개를 외쳤을 뿐이고 니네베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뉘우치고 회개한 것 뿐입니다. 뭔가 대단한 표징이 일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 예언자, 심지어 그마저도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예언자의 외침 소리를 듣고 그들은 기꺼이 회개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표징을 기대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 자체가 악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려는 것을 거부하고 내 욕구에 걸맞는 표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악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그분의 교회가 있고 그분의 사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제가 외치는 메...

유혹

먼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치원생이 가야 할 길이 있고 대학원생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유혹의 여정을 듣고 배우기는 하되 우리에게 같은 유혹이 오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아마 악마가 오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 악마에게 길을 터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첫 번째 유혹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위해서 신앙인의 존엄을 버릴 것인가를 유혹하는 데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로서의 존엄을 버릴 정도로 세상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은 그저 아주 작은 세상의 기회에도 신앙의 여정을 쉽게 내던져 버리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주말에 여행 가자고 하면 주일미사를 우습게 여기고, 그 밖의 여러 기회에서도 신앙의 고귀한 것들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는 아주 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두 번째 유혹은 권세와 영광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일상의 삶을 우선할 때가 있습니다. 빚을 내면서도 정치권에 도전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생각할 때에는 일상을 던져두고 자존심 싸움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이 권세와 영광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마저 앞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세상 안에서 정당한 권세를 얻고 정당한 영광을 누리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악마, 즉 거짓된 영에게 우리의 영의 존엄을 내어바치는 행위를 할 때에 문제가 됩니다. 학교에서 성실히 일해온 학교 선생님이 존경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속여 부당하게 다른 이의 영광을 자신이 쥐는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그 제안을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이를 극복합니다....

구원을 향한 내적 단계

마음으로 믿기 우리의 모든 행동은 '믿음'을 기반으로 우러나오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 돈에 의탁하고 많은 것을 이루어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서 한 사람의 '신뢰'를 살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돈은 물질적 가치의 거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돈으로 할 수 있는 듯이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고, 돈으로 평화를 살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 구원의 은총을 돈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서 성당을 수십개를 짓는다고 한들 하느님의 눈 밖에 난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오직 진실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말은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마음으로 믿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고 그분을 향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냥 오늘부터 믿겠다고 한다고 해서 절로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본래의 길에서 엇나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데에는 꾸준함, 성실함, 식별과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입으로 고백하기 그런 후에야 비로소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입으로만 바칠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묵주기도는 그 진실한 묵상과 더불어 바치기보다 그저 입술만 나불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으로 믿지 않아도 입으로 말을 뱉을 수 있습니다. 흔히 대화 중에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그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무턱대고 그래 그래 하고 있는 사람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신앙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가톨릭의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막연히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에서 ...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까지...

이스라엘의 첫 시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우리 역시도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우리의 존재감은 미미하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은 성장을 하게 됩니다. 비록 이방인의 서러운 삶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성장을 하고 크고 강하고 수가 많은 민족으로 자라납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저런 고된 일을 겪지만 결국 사회 안에서 저마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커짐에 따라서 그를 괴롭히는 이들의 학대가 심해집니다. 우리도 어릴 때는 겪을 필요가 없던 여러가지 고생이 어른이 되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무언가가 굉장히 아쉽고 힘들 때에 본격적으로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하느님은 우리를 들으시고 구해 주실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느님께 부르짖고 그분을 찾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져오는 예물은 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감사'가 기본에 깔려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에 대한 '경배'가 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예물을 바치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어떠한 것들이 깔려 있을까요? 한 사람의 봉헌 행위는 그 내면에 어떤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닐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진정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경배드리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거룩한 행위일까요? 아니면 혹시 모르는 재난에 대비해서 보험회사랑 계약하듯이 드리는 최소한의 계약행위일까요?

단식은 악인들이 하는 게 아니다

단식은 악인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그저 교만과 아집, 허영에 사로잡혀 짐짓 거룩함을 드러내려고 할 뿐 그들이 하는 것은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의인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기쁨 중에 살아갑니다. 의인에게는 아주 작은 선물도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어서 화창한 날씨,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 선한 이들의 모든 표양이 의인에게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따로 단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의인이 단식하는 날은 따로 있으니 바로 '신랑을 빼앗길 때'입니다. 혼인잔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신랑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적어도 그 중에 기뻐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의인들에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있으니 그날이 그들에게는 절로 단식하게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빼앗긴 신랑은 다시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더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족하던 것이 채워지는 만큼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건 바로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는 날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이 날은 각자에게 고유한 성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져야만 하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을 십자가로 해석하면 오류입니다. 자신의 죄와 탓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건 죄를 뉘우치고 하루빨리 없애 버려야 하는 고통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살리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어느정도 성장하고 나면 반드시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이런 십자가를 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아직 유아기적인 신앙 수준에 머무르고 있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게 신앙생활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아담과 이브가 처음 죄를 짓고 한 일은 '숨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들을 눈멀게 했고 그들이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숨을 이유가 없었고 숨는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죄가 그들을 숨게 만들고 숨기게 만들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퍼지고 난 이후에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숨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의인들도 숨길 것이 생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의인들의 의로움을 올바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들도 자신의 의로움을 숨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을 보십니다. 즉, 하느님께는 숨은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숨은 일은 상과 벌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서, 그리고 그 믿음의 근거에 따라 실행한 바에 따라서 상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안 악인들 때문에 고통받던 의인의 고충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의인들을 공격하던 악인의 사악한 의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은 바로 그것을 상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를 가리고 있는 육신이라는 장막이 벗겨지고 나면 모두의 숨겨진 영혼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안에 품고 있던 고결한 정신과 추악한 의도가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그것을 숨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애써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합니다. 보이기 위해서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하느님의 상을 얻기도 전에 드러나는 순간 우리의 상급은 모두 이미 세상에서 사람들의 칭송과 찬사로 인해 상을 받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고결한 선을 최대한 숨기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훗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노력을 후하게 되갚...

백 배 받는 법

손에 뭔가를 쥐고 있으면 그것 뿐입니다. 그 손으로는 더는 다른 것을 쥘 수는 없습니다. 다른 것을 쥐려면 '놓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놓고 나면 다른 것이 내 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쥐려면 또 놓으면 됩니다. 그래서 놓을 줄 알아야 수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을 지닙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 되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아버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아버지를 올바로 받아들이려면 현세의 아버지를 적절히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아버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형제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로 이어진 형제 자매에게 얽매여 버리면 나는 더는 형제 자매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참된 영혼의 피로 이어진 형제 자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의 형제 자매를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집과 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영역에만 집착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물론 그마저도 내가 온전히 지닐 수 없어 결국 선산에 묻히는 것 정도가 최고이겠지요. 고작해야 한 평 땅에 썩어가는 내 육신을 묻고 끝나 버립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수십년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고 파헤쳐지고 말겠지요. 참된 땅은 여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라고 불리는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현세의 땅에 대한 집착을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개인적으로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여러 번 놓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저는 제 출신 본당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여러군데입니다. 유년 시절을 보낸 성당은 신평성당이고, 처음 신학교에 들어간 성당은 김대건 성당이며, 정작 신부가 된 본당은 성서 성당입니다. 저는 구미가 고향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저는 대구 신암동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그...

눈을 감아버린 시대

사람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두려움을 통해서 그에 반발해서 신앙을 붙들게 하는 방법입니다. 흔히 사용되었던 '지옥'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그에 반해서 믿음을 붙들게 하는 방향과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통해서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신앙의 보람과 기쁨, 그 아름다움을 통해서 매력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바람직하고 좋은가? 언뜻 후자가 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두 면을 적절히 내비쳐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는 필요합니다. 아무리 잘 사는 사람도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신의 구원을 두려운 마음으로 챙겨야 할 필요도 있고 또 지독한 죄악 속에 머무르는 사람도 때로는 참된 신앙의 매력에 이끌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올바른 식별력으로 시의적절하게 두 요소를 잘 사용하여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소위 현대적인 교회는 '두려움'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해 왔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느냐고 하면서 교회가 큰 잘못이라도 한 듯이 말하고 가능하면 부드러운 말, 아름다운 말,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말로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는 것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훈육자는 언제나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만 동시에 그릇된 행동을 수정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적절한 자극 없이는 오히려 사람들의 어둠의 성향이 쉽게 강화될 뿐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모르면 어디로 가야 잘 가는 것인지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는 법입니다. 사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습니다. 경고라는 표지판이건, 광고라는 표지판이건 뭐든 보지 않겠다고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둘 다 소용없는 법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모든 것에 눈을 감아버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어떤 것...

싸움을 일으키는 나무

경쟁과 탐욕이라는 것은 반드시 싸움을 부추기게 됩니다. 자리는 하나인데 사람이 두 명이면 그 둘은 반드시 충돌해야 하고 싸워야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피를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쟁이 심한 곳은 언제나 다툼과 싸움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경쟁과 탐욕이라는 것은 바로 싸움이 일어나는 나무이지요. 반면 십자가의 나무는 아무도 선뜻 나서서 그 나무를 독차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모여든 사람들은 싸울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먼저 가겠다는 사람, 더 힘든 십자가를 지겠다는 이를 진심으로 돕고 응원해줍니다. 그래서 십자가 주위에는 진정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평화를 이루는 나무입니다.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는 일의 성과가 아닙니다. 참된 열매는 영혼이 발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훗날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를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이 어떠한가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엉뚱한 열매를 맺겠다고 아름다운 것을 박살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돈 한 푼 더 벌겠다고 신의를 저버리거나 거짓을 꾸며대는 일 따위는 당장 멈춰야 합니다. 세속의 무언가를 얻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내던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현세의 것을 포기하는 법을 조금씩 익혀 나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일

열심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정해질까요? 회사에서 열심하다는 것은 결국 '이득'을 기반으로 정해집니다. 사람을 만나든지 계약을 따내던지 투자를 하던지 모든 것은 그 결과인 이득에 따라서 그 일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이런 흐름이 교회 안에도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과'를 봅니다. 얼마나 큰 성전을 지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와 같은 일들이 세속적인 가치로 바라본 교회의 일이 되고 그것을 위해 온갖 열성을 쏟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기도를 몇만단 바쳤는지, 가톨릭 신문에 났는지 아닌지와 같은 식으로 엉뚱한 열성을 부리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불어난 일은 결국 감당하지 못할 덩어리가 되어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괴로움과 자책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곳입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이 주님의 일, 즉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선교지에서 사람을 모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주 행사를 잡아서 먹을 것을 준다, 좋은 상품을 추첨해서 준다고 하면 사람이 모입니다. 그럼 그 장면을 사진을 찍어서 광고를 하고 우리 성당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고 결국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인 셈입니다. 반면, 한 부부에게 불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한 나이 지긋한 신자 이웃이 수많은 공을 들여 두 사람의 마음을 녹여내고 서서히 봉합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혼의 위기를 무산시키고 둘을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걸 바탕으로 무슨 기사를 낼 수 있을까요? 이를 두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 사람을 위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 이 일은 하느님에게는 너무나 큰 일, 주님의 일이 됩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사람 속의 창고

시골 길을 걷다 보면 여러가지 냄새가 납니다. 어떤 때에는 향긋한 딸기향이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지독한 거름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하우스 안에 집어넣어 놓은 것들이 그 일대에 향기를 흩뿌리는 셈입니다. 저마다 겉모양은 똑같은 비닐하우스이지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냄새를 풍겨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라서 한 사람의 내면을 살피려면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의 내면에 든 것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다만 인간의 내면의 든 것은 그저 달콤하게 느껴진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사기꾼들이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서 그는 '칭찬'이라는 방법을 씁니다. 온갖 칭찬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 후에 그는 서서히 독극물을 집어 넣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한 부부를 시기한 여성은 아내의 마음을 남편에게서 돌리기 위해 먼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아내가 자신에게 마음을 연다 싶으면 그때부터 남편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엉뚱한 곳에 마음을 내어맡긴 아내는 성실한 남편을 로맨틱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은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원한을 간직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부부는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는 사람 속에 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오해하곤 합니다. 안에 참외는 썩어 문드러졌는데 겉 비닐은 화려한 곳이 있는가 하면 겉의 비닐은 허술해도 안의 참외를 정성과 노력으로 기르는 농부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내면의 창고 속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 있는지 올바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