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정해질까요? 회사에서 열심하다는 것은 결국 '이득'을 기반으로 정해집니다. 사람을 만나든지 계약을 따내던지 투자를 하던지 모든 것은 그 결과인 이득에 따라서 그 일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이런 흐름이 교회 안에도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과'를 봅니다. 얼마나 큰 성전을 지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와 같은 일들이 세속적인 가치로 바라본 교회의 일이 되고 그것을 위해 온갖 열성을 쏟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기도를 몇만단 바쳤는지, 가톨릭 신문에 났는지 아닌지와 같은 식으로 엉뚱한 열성을 부리는 이들이 생겨나고 그렇게 불어난 일은 결국 감당하지 못할 덩어리가 되어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괴로움과 자책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곳입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이 주님의 일, 즉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선교지에서 사람을 모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주 행사를 잡아서 먹을 것을 준다, 좋은 상품을 추첨해서 준다고 하면 사람이 모입니다. 그럼 그 장면을 사진을 찍어서 광고를 하고 우리 성당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고 결국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인 셈입니다.
반면, 한 부부에게 불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한 나이 지긋한 신자 이웃이 수많은 공을 들여 두 사람의 마음을 녹여내고 서서히 봉합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혼의 위기를 무산시키고 둘을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걸 바탕으로 무슨 기사를 낼 수 있을까요? 이를 두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 사람을 위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 이 일은 하느님에게는 너무나 큰 일, 주님의 일이 됩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은 잘하면 박수를 쳐줍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은 드러나지도 않고 그것을 잘 한다고 사람들이 박수쳐 주지도 않습니다.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러니 사도는 우리에게 조용히 조언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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