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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의로움이 된다




우리는 '성과'를 통해서 나를 평가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참외를 누가 제일 잘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최종적으로 거두어들인 '수익'을 통해서 평가받게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참외를 돌보고 여러가지 농사 기술에 대해서 알아도 수익이 나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형태가 신앙 안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의로움을 그 성과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것을 두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많이 바치는지, 얼마나 많은 봉헌금을 내는지와 같은 것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의로움의 열성을 판단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창세기의 말씀은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세 15,6)

하느님은 훗날 아브라함이 될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 의로움을 생산한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특정 행위를 하면 그 행위를 통해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모든 의로움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의로운 분이시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이들이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얻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고자 우리가 믿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입니다. 유치원 한 켠에 산더미같이 쌓인 모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이걸 어떻게 치우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한 유치원생이 다가와서 이 모래를 자기가 내일까지 다 치우겠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자 모래가 모두 사라져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 유치원생은 굴착기를 가지고 있는 아빠에게 부탁을 해서 치웠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빠에게 부탁을 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가 자신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줄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로움을 떠올릴 때 이해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늘나라는 오직 하느님의 허락 안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을 통해서 그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자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고 당신의 나라에 받아들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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