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은 악인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은 그저 교만과 아집, 허영에 사로잡혀 짐짓 거룩함을 드러내려고 할 뿐 그들이 하는 것은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의인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기쁨 중에 살아갑니다. 의인에게는 아주 작은 선물도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어서 화창한 날씨, 귀여운 아이들의 웃음, 선한 이들의 모든 표양이 의인에게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따로 단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의인이 단식하는 날은 따로 있으니 바로 '신랑을 빼앗길 때'입니다. 혼인잔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신랑이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적어도 그 중에 기뻐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의인들에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있으니 그날이 그들에게는 절로 단식하게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빼앗긴 신랑은 다시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더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족하던 것이 채워지는 만큼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건 바로 우리에게 십자가가 다가오는 날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이 날은 각자에게 고유한 성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져야만 하는 날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을 십자가로 해석하면 오류입니다. 자신의 죄와 탓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건 죄를 뉘우치고 하루빨리 없애 버려야 하는 고통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살리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어느정도 성장하고 나면 반드시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이런 십자가를 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아직 유아기적인 신앙 수준에 머무르고 있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게 신앙생활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를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반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성경을 솔직하게 읽으면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을 해야 하고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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