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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의 진정한 겸손(연중 32주 월요일)

하느님 앞의 진정한 겸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우리는 하느님의 위치를 잘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의 위치마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을 우리 아래에다 놓고는 부리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에이, 신부님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하시겠지만,
예를 들어보면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한 사람이 성당에 와서 하느님 앞에 서약을 합니다.
지금부터 한 달 간 기도를 올리겠으니 제가 원하는 걸 들어달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한 달이 지나고 결국 현실적으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그토록 기도를 드렸는데 하다못해 내가 청한 것의 100분의 1이라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 생각을 하고는 하느님 앞에서 '토라져서'
이제는 신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나서든지,
아니면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은 믿을 게 못되는구나'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 자신들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가 가득하신 분이시라,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청하는 그 순간부터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약속드린 그 기간보다 훨씬 더 빨리 그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보려는 것만 보려 하고,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결과'만 기다립니다.

돈을 청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분별은 돈보다 인내를 먼저 주고 계시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돈을 받지 못해서 하느님에게 맞서기 시작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내 종으로 부린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느님께서 원하는 일을 하는 게 맞지,
하느님께서 우리가 바라시는 것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간절한 청원은 좋습니다.
하지만 청원을 드린 만큼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미 하느님은 우리에게 갈 길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당장 궁한 돈을 청하기 전에,
아마도 세상의 재화가 인생의 행복에 그닥 소용이 없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지도 모르고,
내가 나의 탐욕으로 그 재화를 합당하게 소유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줄 수도 있고,
내가 청하는 돈이 결국 나의 인생을 돕는 게 아니라 망친다고 알려주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마치 어린애가 엄마에게 사탕을 달라고 떼를 쓰다가
아이의 비대해진 몸과 썩은 이를 걱정하는 엄마가 아무것도 주지 않고
도리어 몸에 좋은 쓴 약을 먹이려 하자
버럭 화를 내는 꼴입니다.

하느님 앞의 우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한없이 드높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유일하고 합당한 행위는
오로지 '감사'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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