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비
한 아이를 하루 온종일 패고 다음날 또 때려가며
'넌 앞으로 날 사랑한다고 말해!!!!'라고 윽박질러서
그 아이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그 말마디가 나에게 기쁨을 줄 것인가?
진짜 사랑은 상대자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붓고 아이가 첫마디를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느날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서는 '사랑해요 아빠'라고 속삭일 때,
어버이 날이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용돈을 모아서 나의 선물을 마련할 때,
그때에 진정한 사랑을 느껴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하느님의 전능한 권능이 우리의 자유의지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 충만하고 자유로운 자녀의 상태에서
두려움에 휩싸인 종의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이다.
하느님이 능력이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은
이미 드러난 수많은 설명할 수 없는 치유들로 알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기적이 그 당사자의 자유의지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더 완성시킨다는 것을 아시면 거침없이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 섭리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제 스스로 하느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고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발 아래 굴종시키려고 한다.
더 많이 앎으로써, 더 많이 가짐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유명세를 타면서 말이다.
하느님의 숨겨져 있는 모습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의 한없이 크신 사랑에 잠겨드는 느낌이다.
그리되면 우리가 '소유'하려 했던 것들의 본질이 보이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들 외에는 마음이 점점 멀어지게 마련이다.
전에는 그 사물의 가치 그 자체에 집착을 했다면,
이제는 그 사물을 둘러싼 보다 본질적인 가치들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형제가 내미는 커피의 질과 향과 가격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그 형제가 나에게 내미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하느님의 더 큰 사랑에 이끌까?"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왜냐면 오직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