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저 예수님의 형식을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다.
남들이 다니지 않는 종교활동을 주일마다 하고,
세례나 견진과 같은 종교적 외적인 틀을 받아들인다고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은 일로써
때로는 전에 지니던 가치관을 부숴뜨리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이라는 건 그런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둘 사이의 이끌림과 같은 것으로
'널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대상의 어떤 '사랑스러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고 귀여운 아기의 사랑스러움을 거부할 자가 누가 있으며,
좋은 음악을 듣고싶어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사랑'이라는 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무언가를,
심지어는 이전에 완강히 거부하던 무언가를 스스로의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 가장 대표주자로는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좀 더 구체화 시켜보자.
사탕을 2개 가진 철수가 있고, 옆에 사탕이 없는 영희가 있다.
2개의 사탕은 마땅히 철수의 것이기에 혼자 다 먹어도 뭐랄 수 없다.
그래서 철수가 가지고 있던 2개의 사탕을 다 먹으면 그것으로 상황 종료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 어떤 '사랑'의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선생님1이 다가와서,
자신이 가진 선생님의 권위로 철수에게 명령을 한다.
'2개를 가지고 있으니 나눠 먹어야 해! 안그럼 혼난다!'
철수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1개를 영희에게 나눠주었다.
결국 여기에도 '사랑'이라고 할 건 없다.
처음의 상황보다 조금 나아 보이지만, 실제로 나아질 것도 없는 것이,
영희는 그저 선생님의 명에 따라 하나를 더 받았을 뿐이고,
철수는 그렇게 빼앗긴 사탕에 대해서 억울해하고 권위에 앙심을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2가 와서는
철수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한다.
'철수는 2개의 사탕이 있네
저런, 영희는 하나도 없구나.
영희가 얼마나 먹고 싶을지 생각을 해 볼까?
철수가 나눔이라는 걸 실천하게 된다면 영희가 참 행복해지겠지?
그러면 영희가 기뻐하는 모습에 철수도 기분이 좋을 거고 말야.'
이런 꾸준한 선생님의 자상한 교육 가운데,
결국 철수가 영희에게 '자발적으로' 사탕을 건네주게 되고,
영희 역시도 그런 철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
선생님은 권위를 버리고 학생을 '사랑'했고,
철수도 영희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으며
영희도 철수에게 선물을 받고 철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세 번째의 상황에서는 선생님의 낮아짐과 철수의 깨어짐이 없이는
'사랑'이 존재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가르쳤고,
몸소 보여주셨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들, 의인도 아닌 죄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이 지상의 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바치셨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를 얻게 되셨다.
그 사랑의 결과물은 바로 '부활' 즉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이 된다.
먼저 이 길을 가셔서 그 결과물을 드러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의 수많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남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을 준비를 한다.
내가 죽으면 자연 남이 살고,
그리고 나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논리지만,
실제로 닥치게 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이다.
예를 들어,
어느 평신도가 주임 사제의 인간적 결함을 느끼고는 참으로 조심스레 충고할 때에
그것에 수긍을 하고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는 여전히 '틀'에 사로잡혀 있고,
옛 포도주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