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고해성사는 최고의 심리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한 사람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신다.'라고 하며 때로는
이 거룩한 성사에 비판어린 시선을 던지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가톨릭 신자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톨릭 신자가 되지도 않는다.)
가톨릭의 올바른 토양에서 자라온 신자라면
'고해성사'가 '사제'라는 도구를 통해 하느님 앞에 죄를 고하고
또한 같은 도구로 용서의 말씀과 확증을 얻는 훌륭한 자리라는 것을 안다.
이는 과학적으로 보아도 건강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심리 치료'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솔직함'인데,
사실 이 솔직함은 의사를 향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고해이기에
더군다나 고해 안에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더욱 더 솔직해지게 된다.
반면, 이런 정황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채로,
그저 '의무감'에 판공때나 비실비실 찾아와서
음식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듯이 죄를 대충 긁어모아서 던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마주하는 건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쓰레기통이기에
그들이 얻게 되는 것도 쓰레기통이 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실한 성찰로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자신의 과오를 털어놓는 이는
본인 스스로 그 효과를 체감하게 된다.
그의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끼고,
샘솟는 기쁨이 마음을 밝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고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심리 치료이다.
그리고 때로는 덤으로 영적 심리적 안정에서 오는 육체적 치유도 뒤따를 수도 있다.
고해성사는 최고의 심리 치료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게 한 사람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신다.'라고 하며 때로는
이 거룩한 성사에 비판어린 시선을 던지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가톨릭 신자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톨릭 신자가 되지도 않는다.)
가톨릭의 올바른 토양에서 자라온 신자라면
'고해성사'가 '사제'라는 도구를 통해 하느님 앞에 죄를 고하고
또한 같은 도구로 용서의 말씀과 확증을 얻는 훌륭한 자리라는 것을 안다.
이는 과학적으로 보아도 건강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심리 치료'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솔직함'인데,
사실 이 솔직함은 의사를 향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고해이기에
더군다나 고해 안에서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더욱 더 솔직해지게 된다.
반면, 이런 정황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 채로,
그저 '의무감'에 판공때나 비실비실 찾아와서
음식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듯이 죄를 대충 긁어모아서 던지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마주하는 건 하느님의 도구가 아니라 쓰레기통이기에
그들이 얻게 되는 것도 쓰레기통이 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실한 성찰로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자신의 과오를 털어놓는 이는
본인 스스로 그 효과를 체감하게 된다.
그의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끼고,
샘솟는 기쁨이 마음을 밝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고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심리 치료이다.
그리고 때로는 덤으로 영적 심리적 안정에서 오는 육체적 치유도 뒤따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