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안에서 만나는 하느님
멋들어진 피정을 하고는 '아, 참 좋은 시간이었어'라고 하면서
일상 안으로 돌아와서는 힘겨운 일이 닥칠 때마다 투덜대며
그 추억의 피정 시간들만을 되새기며 살아가는 이들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언뜻 하느님의 현존을 찾아 헤매는 좋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들의 태도가 드러내는 것은 '일상의 하느님 현존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특정하게 준비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찾는 이들의 모습은
더 나은 환경과 시간을 찾아 헤매이게 되고,
결국 일상 안에서 늘 마주하게 되는 하느님의 현존과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수도생활을 꿈꾸기'이다.
지금의 자신의 힘든 상황을 늘 투덜대기 일쑤이고,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 걷지 않고 있는 길,
즉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삶을 늘상 부러워한다.
그리고 소위 현세와 더욱 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자연스레 더욱 거룩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에 젖어 산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이 특별한 시간들
'피정과 기도의 시간들'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가 결국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늘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없고, 온갖 좋은 프로그램들로 가득찬
'특별한' 시간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눈을 뜨고는 돌아와서 나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수면 중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나에게 맡겨진 일상의 과업을 수행한다고 하느님의 현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그 과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욱 성실히 수행할 때에 나는 하느님의 품에 잠기게 된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은 오히려 나에게 더 큰 목소리로 '사랑'의 계명을 부르짖으신다.
미사는 한 주일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순간에만 하느님을 만나라고 존재하지는 않는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에 익숙해지자.
하느님은 모든 순간에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고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피상적인 사물들 이면에 숨겨진 보다 본질적인 면을 바라보기를 기다리신다.
단순히 나의 시야로 들어와서 나의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의 영을 풍성하게 해 줄 무언가를 만나라고 초대하신다.
이런 시선이 열릴 때에,
나를 성가시게 하던 사람은 지금까지는 단순한 '미움'이나 '교화'의 대상이었으나(나=>상대:일방적)
지금부터는 나의 '인내'와 '사랑'을 위한 훌륭한 훈련도구가 된다.(나<=>상대:상호적)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도록 하자.
그 영적인 민감성에 눈을 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