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고통이 사랑스럽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고통을 사랑스러워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사랑스럽다면 이미 고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여 어느 성인이 고통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그 고통을 인내로이 견딤으로써 얻어질 결과물들을 사랑했을 따름입니다.
우리 삶에서 고통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무엇입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사람의 삶에는 고통이 늘 따라 붙습니다.
이 고통을 잠시 '망각'하거나 '회피'할 순 있어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일차적으로는 육의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 시작되기에 첫 울음을 터뜨립니다.
어머니의 뱃 속의 아이는 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또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아마도 그 생소한 감각들에 깜짝 놀라게 되고,
인간의 육의 고통은 시작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지만,
무언가를 새로이 배워 나갈 때에도 그런 고통들이 필요하고,
그런 고통을 감내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육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추는 것입니다.
나아가 육은 늙고 병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역시 피치못할 우리 삶의 한 부분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육의 고통에서부터 막혀 머물러 있습니다.
어떻게든 육의 고통을 줄이고자 좋은 것을 먹고,
늙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소위 '좋은 직장'을 구해서 몸을 덜 쓰고 봉급을 많이 받고자 합니다.
다음으로 마주하게 될 것은 '정신적 고통'입니다.
육의 고통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이 고통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거나 어떤 일처리를 위해 고심하면서 뒤따르는 고통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그 고통을 미리 맞닥뜨릴수록 사라지게 됩니다.
이 정신도 육과 마찬가지로 약해지기도 하고 병증을 지니기도 합니다.
육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이 고통에 얽매여 머물러 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영의 고통'인데...
이는 두 가지의 양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악한 의지'로 인해서 고통 받습니다.
그 내면에 가득 들어찬 미움, 시기, 분노, 질투, 탐욕 등등으로
꾸준한 고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그 근본의 의지만 바꾸면 내 스스로 만들어내는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만든 영적 고통의 지옥에 스스로 빠져 있는 형상입니다.
그 반대쪽에 선한 이들의 영적 고통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에게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어서 이 육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로 간절히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이 아직도 세상에 남아 더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저 역시도 이 고통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선한 의지로 영의 고통에 민감한 이들은
육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육과 정신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순종시키고 인내를 연습하며
나아가서는 '희생'을 바치고 사랑을 완성해 나아갑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 더욱 찬란히 빛나는 '참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워 사랑하는 건 자연스러움이지 딱히 내세울 사랑이라고 하기 힘이 듭니다.
귀여운 아이가 사랑스러운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토라져 있는 아이들을 품어 안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에 더욱 가깝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준다는 비밀의 열쇠는 여기 숨어 있습니다.
고통 그 자체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더 큰 사랑을 나의 의지에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육과 정신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사랑으로 견뎌 내십시오.
우리가 더 큰 시련을 견딜수록 그에 상응하는 기쁨 역시 더욱 클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