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오늘 내 영적 자녀 하나가, 달란트에 대해서 물어왔다.
기왕 답변을 한 김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은 없지만 달란트는 고대의 화폐 단위였다.
성경 안에서는 어느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영어의 탤런트에 해당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재주' 정도랄까?
남들이 갖지 못한 나의 고유한 재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거고,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도 많이 쓰인다.
누군가가 '야, 넌 달란트가 대단하네'라고 했을 적에,
이 의미는 가진 재주가 많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이런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다시 복음의 달란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5개의 달란트를 받은 종, 2개를 받은 종, 1개를 받은 종.
헌데 많이 받은 종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배를 불려 놓았다.
하지만 하나만 받은 종은 그걸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주인 앞에 내어놓았다.
주인의 말에 주목하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과연 이 달란트가 무엇일진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늘려야 한다는 것인가?
달란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인 삶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 속에 내재된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둠에 물들이지 않고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10계명을 어기지 않으려는 노력,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 큰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가 받은 영혼의 생명이 100%이라면,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 100%을 크게 해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는 노력,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의 노력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이 생명을 늘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뭐? 영혼의 생명을 늘린다고?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자신의 본래의 생명조차도 잃어버린 이웃들을 발견한다.
이들은 100%의 영혼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중이거나 거의 잃어버려
기껏 10%이나 1%의 수준에서 그치는 이들이다.
텔레비전은 보는데 기도할 줄 모르는 영혼들,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영혼들,
세상 물질들에 혼을 빼앗겨 좋은 커피숍이나 찾아다니고
메이커 가방이나 찾고, 적은 노동에 높은 연봉을 위해 기를 쓰는 이들이다.
그나마 영혼에 관심이 있으면 주일 미사라도 나오지만,
그 마음에는 뜨거움이라고는 전혀 없다.
미사는 '영적 보험'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에게 원래의 영혼을 되찾아 주어야 하고,
하느님 가까이에로 이끌려는 노력이 바로
영혼의 생명을 늘리는 일이다.
이런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사가 10%에서 50%까지 오른다면,
우리는 40%의 영혼을 구한 셈이다.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몫이 된다.
하느님에게서 더 멀리 있는 영혼일수록 우리의 노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이너스의 상태에 있는 영혼을 만날 때도 있다.
바로 '죄 중에 있는 영혼들'이다.
이런 영혼들을 이끌어 그들이 하느님께로 다가서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벌어들이는 영혼의 값은 수백배로 치솟는다.
이들은 단순히 퍼센트가 아니라 곱셉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시적인 도구를 써서 영혼사정을 설명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다들 이해하리라고 본다.
우리가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말이다.
3줄 요약
1) 먼저 자신의 영혼을 추스려라.
2) 하느님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는 이웃의 영혼을 돌보아라.
3) 하느님을 등진 영혼들을 구하라.
이렇게 일해나갈 때에 여러분들이 받을 상급이 크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 내 영적 자녀 하나가, 달란트에 대해서 물어왔다.
기왕 답변을 한 김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다 정확한 역사적 지식은 없지만 달란트는 고대의 화폐 단위였다.
성경 안에서는 어느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달란트는 오늘날 영어의 탤런트에 해당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재주' 정도랄까?
남들이 갖지 못한 나의 고유한 재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거고,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도 많이 쓰인다.
누군가가 '야, 넌 달란트가 대단하네'라고 했을 적에,
이 의미는 가진 재주가 많네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이런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다시 복음의 달란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5개의 달란트를 받은 종, 2개를 받은 종, 1개를 받은 종.
헌데 많이 받은 종들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의 배를 불려 놓았다.
하지만 하나만 받은 종은 그걸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주인 앞에 내어놓았다.
주인의 말에 주목하자.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과연 이 달란트가 무엇일진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늘려야 한다는 것인가?
달란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인 삶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 속에 내재된 '기회'를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어둠에 물들이지 않고 보존하려고 애를 쓴다.
(10계명을 어기지 않으려는 노력,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 큰 죄를 짓지 않는 노력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내가 받은 영혼의 생명이 100%이라면,
나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 100%을 크게 해치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하는 노력,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의 노력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이 생명을 늘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뭐? 영혼의 생명을 늘린다고?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자신의 본래의 생명조차도 잃어버린 이웃들을 발견한다.
이들은 100%의 영혼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중이거나 거의 잃어버려
기껏 10%이나 1%의 수준에서 그치는 이들이다.
텔레비전은 보는데 기도할 줄 모르는 영혼들,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영혼들,
세상 물질들에 혼을 빼앗겨 좋은 커피숍이나 찾아다니고
메이커 가방이나 찾고, 적은 노동에 높은 연봉을 위해 기를 쓰는 이들이다.
그나마 영혼에 관심이 있으면 주일 미사라도 나오지만,
그 마음에는 뜨거움이라고는 전혀 없다.
미사는 '영적 보험'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런 이들에게 원래의 영혼을 되찾아 주어야 하고,
하느님 가까이에로 이끌려는 노력이 바로
영혼의 생명을 늘리는 일이다.
이런 이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관심사가 10%에서 50%까지 오른다면,
우리는 40%의 영혼을 구한 셈이다.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몫이 된다.
하느님에게서 더 멀리 있는 영혼일수록 우리의 노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리고 때로는 마이너스의 상태에 있는 영혼을 만날 때도 있다.
바로 '죄 중에 있는 영혼들'이다.
이런 영혼들을 이끌어 그들이 하느님께로 다가서게 되었을 때에는
우리가 벌어들이는 영혼의 값은 수백배로 치솟는다.
이들은 단순히 퍼센트가 아니라 곱셉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시적인 도구를 써서 영혼사정을 설명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다들 이해하리라고 본다.
우리가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하는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말이다.
3줄 요약
1) 먼저 자신의 영혼을 추스려라.
2) 하느님에게서 거리를 두고 있는 이웃의 영혼을 돌보아라.
3) 하느님을 등진 영혼들을 구하라.
이렇게 일해나갈 때에 여러분들이 받을 상급이 크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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