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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시간


마지막의 시간

연중34주 화요일

처음 디카가 나왔을 때에는 640X480 픽셀이었지만,
그저 필름으로 현상할 필요없이 사진이 찍히는 게 신기하고 또 신기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성능이 개선된 디카를 가지게 되었고,
이제 그 예전의 똑딱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훗날 DSLR을 사고부터는 세상의 모든 똑딱이들이 얼마나 하찮게 보이던지요.
이런 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면 예전 것들이 하찮고 우습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간도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어릴 때의 장난과 놀이에서 벗어나
청소년기의 호기심거리와 놀이에 빠져들고
나아가 어른이 되면서 술자리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렇게 상승기류를 타다가 나이가 들어지면 하강기류를 타겠지요.

사실 벌써부터 그런 기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술도 20대처럼 마시지는 못하겠고,
노래방에 가도 아는 노래가 없습니다.
음식도 과식을 하면 곧잘 체하곤 하고
아름다운 이성을 보아도 10대의 감성처럼 마음이 두근거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업그레이드'의 시기입니다.
이제는 현세의 상승이 아니라 '영원'의 상승을 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현세의 것들을 '포기'할 줄을 알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처세술책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라고 가르치지만,
저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젠 세상 것들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천상의 가치들을 배워 나가야지요.
한편으로는 포기처럼 보이고 무능해 보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보다 참된 것을 손에 쥐는 시기입니다.

처음에는 젊은 날의 기호들이 포기되고,
다음으로는 소위 '야망'이 포기되고,
그 밖에도 명예나 권력따위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지혜'가 늘어나겠지요.

이러지 못한 추한 어른들이 있으니,
여전히 세상의 논리에 같이 뛰어들어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는 이들입니다.

할머니들이 화장을 분장 수준으로 하고 나다니는 모습이나,
할아버지들이 악착같이 돈욕심을 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왜 그렇게 안타까울까요?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시간을 예고합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쫄지마'라는 말입니다.
준비된 이들은 영원으로 업그레이드 될테니 쫄지 말라는 말이지요.

복음의 초반에 사람들이 여전히 성전의 화려함을 칭송하는 모습을 보고는
어지간히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셨을겁니다.
'그게 아닌데...' ㅎㅎㅎ

그저 아침에 큰 마음의 가책이나 부담없이 일어나서,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고,
부담없는 식사 한 끼 할 수 있을 정도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은 시간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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