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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안에서의 지옥


세상 안에서의 지옥

그동안 여러분에게 거룩함으로 다가서는 길에 대해서 서술한 반면,
오늘은 조금 반대 방향을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지극히 기초적일지언정 다들 지니고 있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다못해 입술로라도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삶 안에서 드러내는 모습은,
하느님의 나라는 커녕 지상의 '나의 왕국'을 건설하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반대의 모습을 서술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런 반대의 모습을 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이 글을 읽게 되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균형감각'이라는 것이 필요하며,
좋은 쪽이 좋다고만 해서는 그저 막연하게 자신이
그 쪽에 향해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기에
이번에는 정 반대의 방향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의 나라', 제가 붙인 제목처럼 '세상 안에서의 지옥'역시도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구닥다리 같다는 느낌입니다.
수세기 전에나 통할 법한 교리지식 찌꺼기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
저 역시도 이런 느낌을 20대의 시기 동안 많이 가져 왔습니다.
일단 우리가 이성적인 사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는 그러합니다.
지옥은 어디 도시가스 폭발 현장 같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왜냐하니 죽고 나서는 '장소'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많은 영적체험을 한 이들이 '지옥'을 어떤 장소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 땅의 사람들, 여전히 공간이라는 개념에 묶여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설명 말고는 딱히 제대로 풀어낼 수 있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옥'은 실존하는 것이며,
그 곳의 주인은 '어둠의 세력'들인 '사탄'과 그 하수인들입니다.
그리고 '불'이라는 개념 역시도 그 본질적인 의미를 파고 든다면
그 안에서는 늘 타오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불'에 조금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불은 '뜨거움'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이 그 불 근처를 다닐 수는 있어도
나에게 그 불이 붙는다면 그 뜨거움을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불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은 그걸 견뎌냅니다.

누구나 '미움, 증오'의 체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영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호르몬 작용으로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흥분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그 어둠의 세력의 불로 타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움'이나 '증오'에 사로잡힌 이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어느새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그 영이 타들어가 참된 기쁨과 평화에 대한 열망을 잊어버린 지 오래인 이들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주변의 도움이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조언'을 해 주기도 하고,
좋은 글이나 영화를 보고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도 하며,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의 행위를 통해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도움이 끊기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죽음'입니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상실'해 버리게 되고,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영의 상태에 고립되어 버립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상상할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그 어둠이 얼마나 짙을 것이며,
이미 타오른 내 영의 저주의 불꽃이 얼마나 강력할는지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는
'희망'조차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제 마음이 어두워지는 걸 느낍니다.
여러분도 이런 글 따위는 잊어 버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에 우리에게 다가올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느낌은
잘 간직하셨으면 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실제적인 삶 안에서 서로 다투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스로 그 길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 적은 글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영적인 여정에는 '진보' 아니면 '후퇴' 뿐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매 순간 뒤로 물러나게 됩니다.
왜냐면, '사랑'에는 한계가 없으니까요.

너희들이 작은 일에 충실했으니 큰 일을 맡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고,
오늘 하루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 실천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는 영적 민감성 속에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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