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개신교와 가톨릭


개신교와 가톨릭

많은 분들이 도대체 둘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곤 합니다.
개신교 분들로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마리아 숭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그릇된 모습부터 시작해서,
'고해성사'라는 것에 대한 이해의 부족(한 마디로 어떻게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는가?)
그리고 '결혼하지 않는 사제'에 대한 나름 심도있는 성찰까지도...

하지만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것들이고
본 줄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개신교'라는 말의 근본으로 돌아가면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자'라는 말과
다른 한 편으로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항의하는'이라는 말인데 일리있는 말입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지요.
당시 가톨릭 교회 내의 부패상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패상이 싫다고, 가톨릭은 이미 옆길로 새어나가 버려서 긿을 완전히 잃었다고,
자신들이 보다 신앙적인 본 흐름, 복음을 중심으로 하는 보다 근원적인 줄기에 편승한다고 하면서
(가톨릭에서는 개신교가 떨어져 나갔다고 표현을 하지요. 저마다 자신의 교회의 입장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가톨릭과는 다른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면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측에서 강조하는 이 교리들은 한편으로는 같은 내용을 다른 면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각각의 종파마다 그 강조점을 달리하고 그 의미를 달리해서 사실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 그럼 여기에서 저의 개인적인 소견을 잠시 들어보자면,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데,
그만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바이러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졌는데,
다만 오른팔이 자신은 아직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헌데 이 오른팔이 그만 '결별'을 선언하고 나섭니다.
자신들만의 맑고 순수한 몸을 새로이 만들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아픔을 겪고 떨어져나간 오른팔은
얼마간 잘 지내는 듯 보였으나, 결국 그 오른팔에도 감염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육신이 아프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그 오른팔에서 또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서로 갈라선 지체들이 또 나뉘어지고,
또 나뉘어집니다.

결국 오늘날 개신교 종파들은 수백개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신이 복음의 순수성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오히려, 그 첫 갈림에서 오른팔이 제 기능을 다 해서,
아파하고 있는 그 몸뚱아리 전체를 살리려고 노력했다면,
다른 몸이 다 몸져 누웠는데도 오른팔만은 살아서 바닥을 기어서라도 그 온 몸뚱아리를
병원으로 옮겨 갔다면,
아마도 지금의 갈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본 몸뚱아리는
지금도 이런 저런 질병들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 한가운데의 '심장'과 그 몸을 움직이는 '머리'는 여전히 원래의 목적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그 수많은 지체들을 여전히 하나의 몸뚱아리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소견(가톨릭 교회에 몸담은 사제의 소견)이며,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입장 안에서 '개신교'를 본류에서 떨어져 나간 교회로 매도하기 쉽상이고,
개신교 교회는 자신의 입장 안에서 '가톨릭'을 본질을 잃고 죽어버린 교회로 매도하기 쉽상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한 몸에서 나온 자식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일부러 '하나님'이라고 적어 보았습니다. 이런 말마디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 스페인어로는 Dios이고 영어로는 God입니다. 한국에서만 치졸하게 다투는 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나가야 하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서로를 향한 비난과 추궁의 화살을 돌려,
지금 나 스스로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에,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