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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왜 나가야 하냐구요?


성당에 왜 나가야 하냐구요?

"가면 재미없어요. 신부님은 맨날 지루한 이야기만 하구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좌 신부님들이 교리교사 선생님들이
기를 쓰고 '재미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에는 역부족입니다.
성당 안에서 '무한도전'에 버금가는 뭔가를 만들기에는
역량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 노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사탕을 먹이는 이유는,
아이들 입맛에 맞기 때문이지,
몸에 좋아서가 아닙니다.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쓴 것,
치아를 썩게 만들고 몸을 비대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탕은 곧 치워야 합니다.

성당은 왜 가야 하는 걸까요?
그냥 집에서 적당히 좋은 글 잃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되는 걸까요?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고 모든 곳에 다 있다는데,
왜 굳이 성당을 가야 하는 걸까요?

첫 번째 이유는 '미사' 즉 '성찬례'와 각종 성사들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목이 말라 물을 찾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던지,
물기가 있는 풀들을 끌어모아 즙을 짜내 마시던지,
동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던지...
하지만 여러분들 근처에 정수된 물이 콸콸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는데
여러분들이 그 수도꼭지에 다가서지 않고 다른 데에서 물을 찾겠노라고 나선다면,
그 광경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샘,
우리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빵과 포도주로 변한 우리 구원자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사제가 어떤 강론을 하고 사제의 성격이 어떻고, 성당 사람들이 어떻고는 모두 부차적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성당을 가야 합니다.
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러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수도꼭지가 녹슬었다느니,
모양새가 맘에 들지 않는다느니,
꼭지를 틀 때마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느니 하면서
그 '물'을 마시기를 거부한다면,
오호통제라...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교육'입니다.
교회의 제단체들은 여러가지 교육을 목적으로 합니다.
활동하는 단체들은 '봉사'를 교육하기 위함이고,
성경공부나 다른 신심단체들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나 영성'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이런 갖가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도 충분히 이룰 수 있다면 혼자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같은 신앙을 지닌 이들과 살갑게 부딪히지 않고서
혼자서 도도하게 신앙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관상수도회'의 영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하다못해 '반모임'에라도 나가서 일주일에 한 번 이웃과 삶을 나누고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고,
그 밖에도 자신의 탈렌트에 따라서 '봉사'를 하거나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지,
너희가 아는 걸 고이 간직하고 향유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제가 처음으로 제시한 '미사'라는 말마디의 근원부터가
'파견'이라는 Mission에서 나왔다는 걸 생각한다면,
우리는 방구석에 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른 이유들을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이 큰 두 가지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는 건 없으리라고 봅니다.
성당으로 나아오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의 샘에 참여하고 여러분이 가진 탈렌트를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교회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구성원들이 많이 부족하다고, 교계제도에 몸담은 이들이 유별나다고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보기에는 너저분해 보여도,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단체입니다.
부족함이 있다고 회피할 게 아니라,
그 부족함을 나의 사랑으로 메꾸어 나갔으면 합니다.
성당으로 나아오십시오.
모두 힘을 모아 하나가 되십시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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