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지고 바라보는 것을 뛰어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눈 앞에 놓인 박스, 그 안의 것을 실제로 바라보고 느끼는 것과 같이, 우리 눈 앞에 놓인 사물들의 건너편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그 이면에 하느님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책상에 마주앉아 타자를 치는 나 자신을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내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나 자신의 존재, 그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관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영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지 않고 그저 내 눈 앞에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게 된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의 가치에만 집중해서 가방은 현금으로 얼마, 구두는 현금으로 얼마만을 따지고 그 상표가 무엇인지 따위에만 집중을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것은 그 음식의 맛을 즐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피상적) 그 맛있는 음식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음식을 함께 나누기도 위함인 것이다(영적). 이렇듯 일상 안에서 '영적'인 훈련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에게 사물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기뻐하게 될 것이며, 이 기쁨은 이전의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더 진솔하고 은은한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그 이면에 하느님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책상에 마주앉아 타자를 치는 나 자신을 느끼면서도 실제로는 내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나 자신의 존재, 그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관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영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지 않고 그저 내 눈 앞에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게 된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물들의 가치에만 집중해서 가방은 현금으로 얼마, 구두는 현금으로 얼마만을 따지고 그 상표가 무엇인지 따위에만 집중을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이면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맛있는 음식이 있는 것은 그 음식의 맛을 즐기기 위함이기도 하지만(피상적) 그 맛있는 음식을 통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음식을 함께 나누기도 위함인 것이다(영적). 이렇듯 일상 안에서 '영적'인 훈련을 계속해나가는 사람에게 사물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기뻐하게 될 것이며, 이 기쁨은 이전의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기쁨이 아니라 더 진솔하고 은은한 기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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