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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제가 겪어본 바로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그만큼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막상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잔뜩 꺼내 놓기만 합니다. 그 들은 이야기들이라는 것은 지금 포털 사이트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새로나온 신상품 이야기, 화제의 기사거리, 정치 사회적 문제들, 연예인들 이야기 등등 모든 이야기들을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자기 이야기는 쏙 빠져 있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외로워서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 거지요.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할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 오늘날의 현대 사회라는 곳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쉬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지루한 그들의 이야기를 참아 견디기도 해야 합니다. 나로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만 함께 하는 자리라서 참아 견디고 앉아 있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언젠가 정말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 나를 찾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들 안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주기 위해서 준비를 갖추기도 해야 합니다. 좋은 가이드가 없으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헛된 이야기로 끝나 버리고 말지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게 도와주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지요. 그러면 아주 멋진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의 마음이 치유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단지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치유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자기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늘 투덜대던 문제의 본질이 자기 밖의 어느 대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세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너무나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입니다.

(참고로 이 과정은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인터넷의 채팅창으로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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