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의 문제는 ‘하느님의 상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고 우리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정도만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요. 하느님을 거부하려는 사람은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강제로, 억지로, 의무적으로 우리가 당신을 섬기게 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앙’에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본래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지요. 강요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보다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육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육신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더 넓은 창고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웃의 필요를 과감히 무시할 필요도 있었지요. 이제는 더는 서로를 돌보아주지 않게 되었고 그것이 합당한 일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제 몫을 합당하게 챙기면 죽어가는 이를 돕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은 ‘옵션’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쏟고 남은 것을 쏟는 여가활동처럼 되었지요.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올바른 신앙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인 선택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기본적으로 헌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는 것이지요. 계속 이리저리 합리적으로 재기만 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셈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관측하고 나서 그 첫 걸음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서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분을 따라 나설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헌신이 없으면 신앙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안전’을 추구하고 모든 것을 안정된 상태에서 이루려 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더더욱 하느님을 상실하고 있는 중입니다.
준비된 모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 퍼즐 조각이 없으면 결국 그림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남은 선택을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하고 그 믿음에 따라서 움직여야 합니다.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잃은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 4,24-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