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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사랑(생명의소중함)


1.동성애자를 우리청소년들이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그 둘이서 서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벗어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한 형제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적으로 행하는 같은 성 끼리의 부자연스러운 관계마저도 합당한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특히나 인성이 형성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분명히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들이 행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2.피임에 대한 생각을 알려주세요~
피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은 단순한 육적 쾌락의 행위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고유의 역할의 차이와 사랑, 나아가 남녀가 혼인으로 일치하여 사랑의 정점에 이르는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만일 성이 제 목적대로 올바르게 이루어진다면 ‘피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서로 존중하고 살아간다면 자연스러운 주기 안에서 다가오는 자녀라는 선물을 너무나도 감사히, 또 소중히 여길 것이고 서로의 사랑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피임이라는 것은 바로 이 근본적인 선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필요성입니다. 둘이 하느님 안에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나아가 서로 온전히 사랑하고 자녀를 책임질 정도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가 생기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것이지요. 만일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교적인 가치 안에서 살아간다면 ‘피임’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적이지 않고 지금의 육적인 세상에서 성관계의 유혹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임의 다양한 방법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큰 죄가 되는 ‘피임’의 방식은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즉, 피임이 아닌 수정란을 죽이는 사후 피임약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여성에게 호르몬 이상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화학적인 피임약들도 절제하고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교회가 권장하는 자연 주기법과 콘돔을 사용하는 물리적인 피임 방법 뿐이겠지요. 그러나 자연 주기법은 부부 사이에서 상호 존중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결국 부부가 아닌 관계에서 스스로의 욕구를 절제하기 못해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 피임 방법은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성교육은 이미 학교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피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받지 못한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피임을 가르치기 이전에 남녀의 성의 차이와 참된 사랑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임의 지식만을 배워서 결국 성을 망가뜨리고 말 것입니다.

3.혼전순결을 지켜야하는가? 사랑을하면 꼭 성행위를 해야하는가?
혼전순결이라는 것은 마치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는 오늘날 혼인의 가치 자체가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혼전 순결을 가르치려면 먼저 ‘혼인’을 올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과연 혼인은 무엇입니까?

혼인이 단순한 계약이라면 맺고 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의 혼인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몇 번이나 이혼을 하고 새로이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수근대면서도 부러워하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가치의 혼인은 단 한 번 뿐이며,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며, 자녀 출산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필생의 약속 속에서 혼인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런 약속을 온전히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때에 ‘성(性)’이라는 것도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혼전순결을 지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과연 혼인은 신성하고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동네 개들 접붙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맺었다 끊었다 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먼저 스스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 혼전 순결에 대한 의견도 뒤따라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결혼을 엉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혼전 순결에 대한 의식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반대로 결혼을 일생의 결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 결혼 안에 준비된 성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남녀가 온전히 사랑을 하면 당연히 성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행위라는 것은 거룩한 행위이지 쾌락 ‘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성행위는 인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남녀의 사랑이 그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문제는 그 사랑이 정점에 이르기 전에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성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4.인간은 성별이 왜 구별되는가?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만드셨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히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홀로 온전히 완전할 수 있다면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고 딱히 상대를 향해 사랑을 내어주고 사랑을 갈구할 이유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온전히 한 몸을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정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지요. 물론 때로는 하느님을 너무 사랑해서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봉헌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5.어떻게 하면 성병에 걸리는가?
당연히 성병을 지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으면 성병에 걸립니다. 하지만 다른 요인으로 성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에 감염되더라도 성병에 걸립니다. 따라서 문란한 성관계를 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성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게 되겠지요. 하지만 성행위를 하지 않아도 성병에 걸릴 확률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나 여성의 경우에 청결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 성기의 부위가 상할 수도 있을테지요. (이 부분은 제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서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올바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6.청소년기에 이성에 대한 바람직한생각이 무엇인가?
청소년기에 자신의 성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나아가 이성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관계는 늘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아직 ‘책임’을 질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요. 따라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 나이와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을 만나고 서로 다른 성의 모습 안에서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7.지금 낙태를 해도 괜찮은가?(성폭행을당했을때)-아이입장으로는 낙태는안되고,피해자입장에서는 범죄자의 아이를 낙태해야되는것이 아닐까?
비록 성폭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낙태는 한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에 하면 안됩니다. 아이를 낳고 입양을 보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낙태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산모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교회는 단순히 모든 상황에서 낙태를 하지 말라고 우격다짐으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예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욕을 지나치게 발동하는 현대 문화에 대응해서 절제와 경건과 상호존중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적인 예방의 가르침을 전하는 중에 낙태에 관한 문제가 닥쳤을 때에는 ‘생명’을 수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낙태를 저지른 후에 뒤늦게 후회하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려는 이를 잘 끌어안아 주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성폭행은 분명 사악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성폭행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의 일들도 이미 일어나 버렸다면 약하고 가난한 이를 끌어안아 줄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낙태는 아무런 죄도 없는 새로운 생명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이 명제에는 이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8.음주 후 성범죄 행위는 형을 줄여주는데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명 음주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분별은 법정에서 심판하는 일을 맡은 이들이 올바르고 합당하게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이기 보다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성폭행을 하는 이들은 주로 남자들이며 그 사안을 심판하는 이들도 주로 남자들인 경우가 많고, 나아가 우리 사회는 남성들의 성적 일탈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연 이런 판결의 경우에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한 인식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올바로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9.청소년기에 성관계가 옳은지에 대한 생각?(한국 평균 첫경험나이15.1세)
당연히 옳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청소년들이 사랑과 책임이라는 성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할 리가 없기 때문이고 단순한 호기심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투른 성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들의 성관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왜 그 나이에 그렇게 성에 관해 집착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 어른들은 충분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정상이지만 오늘날 청소년들이 호기심을 넘어서서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은 분명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아이돌들이 소위 청소년 문화 소비자들의 구입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대표적인 하나는 성적 코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인터넷의 자유로운 정보 검색은 포르노 그래피를 통해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에 분명 이바지하고 있지요. 또한 청소년기에 활기차게 뛰어놀지 못하고 공부에 억압되어 있는 아이들의 현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에너지는 다양한 수단으로 표출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억누르게 되니 자연 바람직하지 못한 쪽으로 분출되고 마는 것입니다.

청소년의 성관계는 다양한 부속적인 문제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신앙의 가치에 대한 참된 교육, 그리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여러 안타까운 사례를 바탕으로 한 성교육이 동반되어 여러가지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0.여자가 화났을때 대처법
여성은 감정이 풍부하고 참으로 섬세합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변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풍부하다고 해서 매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남성에게 있다면 당연히 남성이 뉘우치고 화를 낼 여지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반대로 화를 내는 이유가 여성 본인에게 있다면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남녀 간의 연애 문제는 단순히 남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격적 미성숙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연애를 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솔직한 대답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11.남녀 가치관의 차이
남녀가 다르다고 해서 ‘가치관’이 다르지 않습니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 삶의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그 밖의 것들이 사회와 문화와 그 밖의 다양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지요. 예컨대 볼리비아에서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처럼 한입거리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도 아니고 닭고기에 속속들이 박힌 살코기를 남김없이 뜯어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밥상 머리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꾸중을 하는 어르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가치관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성장해 가면서 조금은 서로 다른 교육을 받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진취적이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뭔가 적극적인 교육을 받는가 하면 여자는 정숙하고 가정을 보호해야 하는 교육을 받는 것이 한국적인 사회에서의 남녀의 가치관의 형성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변화되고 있지요. 여성도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남성도 가사 일을 도와야 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남녀의 신체 구조와 그 특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남성은 여전히 그 남성성에서 기인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고, 반대로 여성은 그 여성성에서 기인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마치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질문의 흐름에 따라서 ‘성(性)’에 관해서는 남녀의 가치관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정결해야 하고 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배우고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는 마치 남성의 무절제를 허용하고, 심지어는 여성도 얼마든지 그렇게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12.연애잘하는법
외모에 혹하는 배우자와 연애를 잘 하려면 외모를 꾸미면 되고, 내면의 가치를 찾는 배우자와 연애를 하려면 내면의 가치를 꾸미면 됩니다. 만일 연애를 잘 한다는 표현을 이런 저런 배우자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에 빠져 있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을 한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남녀 상호간의 이성의 호기심을 채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두고 연애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초라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은 사실 대답할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을 진정으로 하는 방법을 물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13.결혼을꼭해야하는지
결혼이라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결혼은 상호간의 선택이고 결심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지요. 따라서 결혼을 할 자신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결혼은 하지 않은 채로 독신으로 살면서 이성과 연애만 하고 성관계만 즐기겠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혼인 안에 사랑의 극단에 ‘성’을 배치해 두셨습니다.

14.결혼 후 아이를 낳아야하는지
결혼은 아이의 출산으로 완료됩니다. 그리스도교적 혼인 안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으면 혼인은 완료되지 않습니다.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아야 하고 자녀 출산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는 낳지 않고 결혼 생활 만을 하겠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고 또 한국 문화 안에서 부모님에 대한 도리에도 합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15.공공장소에서 스킨쉽에 대한 허용정도는?
딸을 낳아서 그 딸이 밖에서 하고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딸이 길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딥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더듬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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