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22,7)
사울은 그리스도를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만난 적도 없는 그리스도를 박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신앙을 지닌 모든 이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나머지 지체가 모두 그 아픔을 느낍니다.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지만 그들은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픔을 느끼고 사울을 회개에로 초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 안에 연결되어 있을 때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그 즉시 하느님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하느님은 너무나 크고 선하신 분이어서 우리에게 악을 가하는 이들 마저도 구원하고 싶어 하시기에 당신의 정의의 실행을 늦추시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의미있는 것입니다. 내 몸의 아주 작은 불편이라도 우리가 곧 신경을 쓰게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의 아주 작은 신음소리 하나도 하느님은 소홀히 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고통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 안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운데도 하느님께서 당장 이 고통을 해결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다른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고 따라서 나에게 이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의 표현들이 모두 어리석은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모든 고통은 사라져야 할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은 ‘어리석음의 상징’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 그 기적의 능력으로 세상을 쓸어버리면 될 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생각이 배반자 유다의 생각이었고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에게 고통이 다가올 때, 그것을 끌어안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끌어안으시고 모든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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