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물을 두고 원하는 대로 쓰게 마련입니다. 나무토막은 베게 대신으로 쓰일 수도 있고 불을 피워 한 순간 몸을 덥히는 데에 쓰일 수도 있고 조각을 해서 아름다운 상을 만들어 보다 소중한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양한 쓰임새가 있습니다. 저는 사제이지만 또한 만화가이기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고, 블로거이기도 하고, 그냥 재미진 시간을 보내는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저에게 다가와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취해갑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다 취하고 나면 그 밖의 것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지요, 한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재능보다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것을 얻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저의 사제직은 제 재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에게 와서 제 존재를 뛰어넘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하는 요소를 만끽하려 하지 않고 그저 인간적인 재미 만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월요일마다 하는 성경모임에 나가서 언제나 성사를 보라고 하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오후의 한 시간 정도 별다른 할 일이 없어 모이는 모임에서 저를 흥미의 대상으로 접하고 집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눈이 찢어진 동양 남자가 자기네 말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신기한 것이지요. 물론 그 가운데에는 저를 ‘사제’로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마다 필요한 것을 취하는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우리들의 성향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엉뚱한 방식으로 찾습니다. 제가 필요할 때에만 찾지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마땅히 감사와 찬미와 존경과 신의와 사랑을 드려야 하는 분이지 우리가 필요할 때에만 찾는 동네 구멍가게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그릇되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과 신앙에 대한 이러한 그릇된 이해는 잘 사는 나라일수록 더욱 극심합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기댈 것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잃기 시작합니다. 하느님 없어도 얼마든지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에 신앙은 심심할 때나 찾아가는 옵션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반면 가난한 나라의 사람일수록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의존도가 높습니다. 병원 문턱에도 가지 못하는 이에게 남는 것은 기도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께 의탁하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당신 품에 안아 돌보십니다. 이는 하느님이 한 부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에게 더 많은 믿음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이라는 하루는 과연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대로 그 하루를 거룩하게 이끌고 있을까요? 아니면 흥청망청 나의 욕구를 쫓아가며 하루를 허비하고 있을까요? 모든 시간에는 그 안에 숨겨진 가치가 있습니다. 선물이 많다고 해서 모두 가치있는 선물은 아닌 것처럼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무조건 그 일이 가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에 진리와 선과 인내와 겸손을 담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짧은 생이 영원의 가치로 가득차게 될 테니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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