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가르침은 언제나 반발을 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가르침은 우리 안의 그릇된 흐름을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거짓말을 하는 아이에게 ‘진실하라’는 가르침은 거북함을 주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거짓말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미 진실한 삶을 사는 아이에게 ‘진실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런 저항감을 주지 않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충실하라’는 가르침은 거부감을 줍니다. 이미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헌신하는 남편에게는 아무런 느낌이 없고 편안한 가르침일 뿐이지요.
이처럼 거룩한 가르침은 언제나 반발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언제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는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일상적인 중상과 모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악한 의도로 이루어진 계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이가 거룩한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곳에는 그릇된 것이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략을 짜서 그를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자신들 스스로 악의 최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마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처럼 거룩한 이들도 거룩한 죽음(그러나 세상에는 억울하고 말도 안되고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데에는 단순히 육신이 파괴되는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명예도 파괴되고 관계도 파괴되고 감정도 파괴되는 다양한 형태의 죽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거룩한 이들은 이러한 순교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지막 종착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무너지지 않으며 반드시 그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의도로 왜 이런 일들을 했는지 우리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거룩함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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