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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된 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18-19)

기름을 부음 받은 자, 영을 수령한 자는 파견된 자입니다. 파견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특별히 그런 지위들을 수여하십니다. 파견을 받은 자는 사명이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 일은 다음과 같은 일입니다.

1)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세상에는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재화가 없는 이들도 가난한 이들이지만 정말 가난한 이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믿는 이들입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의 손에 쥐어지는 것만을 움켜쥐고 자신이 아는 것만 알고 자신의 세상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비록 물질적인 재화가 부족해서 불편한 생활을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이들은 사실 부유한 이들입니다. 참된 복음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잡혀간 이들에게 선포되는 해방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싸워서 유배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잡혀가는 것을 반드시 물리적인 범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죄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어둠의 주인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즉 사탄의 노예들이 되고 맙니다. 일단 죄에 사로잡히게 되면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힘들게 되지요. 사명을 받은 이는 이렇게 사로잡힌 이들을 구해 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빛을 밝혀 주고 그들이 어둠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지요.

3)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기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눈먼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몸에 달린 눈이 사물들을 바라볼 수는 있어도 영적인 눈이 감겨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닥치는 대로 아무것이나 본능에 끌리는 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어둠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명을 받은 이들은 눈먼 이들을 도와 다시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4)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유혹’이 상존합니다. 사람이 육신을 지니고 사는 동안에 세상의 유혹이라는 것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달림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파견받은 이의 지도와 인도를 통해서입니다. 유혹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이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한 사람은 자신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5) 주님의 은혜로운 해의 선포
이상의 모든 해방이 이루어지고 나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얻고, 해방을 얻고, 다시 보게 되면 자연스레 하느님을 진심으로 찬미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일이 일어난 이후에 자연스레 다가오는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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