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의 비유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지금의 생활과 가장 밀착된 비유를 쓰곤 하셨지요. 당시에 포도나무는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포도나무의 비유는 제자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포도나무가 어떻게 생겨 먹은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 사명이 우리 사제들에게 전해진 셈이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알아듣기 쉬운 방법을 강구하고 찾아내어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휴대폰과 같은 수단으로 비슷한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은 스마트폰은 거의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비슷한 비유를 들 수 있겠지요.

쳐냄과 손질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의 운명과 열매를 맺는 가지의 운명을 다르게 표현하십니다. 하나는 쳐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질하는 것입니다. 가지를 쳐내고 나면 그 가지는 더는 줄기의 수액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메말라가고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게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열매, 즉 사랑의 열매를 합당하게 맺지 못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쳐내 버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갈수록 메말라가는 것이지요. 반면 손질하는 것은 더 훌륭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손질 당하는 가지의 입장에서는 이 역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잎새가 잘리고 잔가지들도 잘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더욱 훌륭한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지상의 것들을 희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됨
예수님은 당신의 말로 제자들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깨끗하게 할 때에는 주로 ‘물’을 사용합니다. 맑은 물을 부어서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지요. 마찬가지 작용이 영혼에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맑은 물과 같은 가르침을 얻게 되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예수님의 말씀을 더 자주, 더 많이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줄기에 붙어 있기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에게 붙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야 그분의 말씀을 얻을 수 있고 그분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그분의 은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맺는 열매는 모두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잘려 메마르고 결국 불쏘시개로나 쓰일 나뭇가지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하라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어 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든 청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붙어 있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성당에 있다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때에 우리는 붙어 있는 셈이 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를 착각하고 자신들은 지금껏 잘 살아왔는데, 즉 성당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왜 자기들 소원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나쁜 일만 생기느냐고 투덜대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혀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당을 나오면서도 교만하고 미사에 참례 하면서도 누군가를 험담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누군가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붙어 있지 못했고 청할 수도 없는 셈입니다.

아버지의 영광
우리가 열매를 맺고 주님의 제자가 되면 아버지의 영광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광입니다. 세상에서 뭔가 재능을 펼쳐서 사람들의 찬사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또 변덕스러운 것입니다. 참된 영광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실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첫걸음은 바로 예수님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기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에 이르면 우리는 곧 하느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는 방법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곧 기쁨
사랑하는 사람은 기쁩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지요. 우리가 영양가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면 몸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지는 것과 같이 영혼이 맛있는 사랑을 받으면 기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기쁨이 머무릅니다. 

사랑
주님의 계명은 사랑이고 그 사랑의 최고 정점은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주어진 것 가운데 최고는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그 모범을 보이셨지요. 당신의 십자가가 사랑의 상징이 되는 이유입니다.

종과 친구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이들입니다. 친구는 친구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우리를 영원으로 이끄시려고 하신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고 지금의 교회는 그 가르침을 간직하고 누구든지 배우고 싶어하는 이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뽑힌 우리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뽑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것이지요. 우리가 뽑았으면 우리가 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하느님이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뽑혔으면 우리는 선발된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뽑힌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함이고 하느님은 그 열매가 우리에게 영원히 선물해 주시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이지요.

세상의 증오
선발된 이들의 운명은 세상의 증오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여느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반대되는 속성(거짓, 불의, 부정 등등)을 지닌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발되는 이들은 세상에 속해 있다가 하느님의 편으로 넘어간 이들이 되고 따라서 세상은 그들을 증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느님의 외아들, 즉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같은 길을 걷게 되는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을 증오하는 이들의 핍박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드러난 그들의 현실
그들은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빛이 없이 온 세상이 어두우면 따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고 나면 그림자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사랑과 진리의 빛을 비추자 그 이면에 증오와 거짓으로 가득한 이들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자신의 증오와 거짓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속이면서 제 몫을 챙기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더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는 그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의 영

그러나 진리의 영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그 영을 받은 우리들도 같은 일을 하게 됩니다. 즉 반대로 말하면, 예수님을 옹호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진리의 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