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한다는 것과 논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휴식은 정적인 것이고 쉼을 의미하고 논다는 것은 활동적인 것이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행위이지요. 일단은 논다는 것이 일을 쉰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언뜻 휴식의 일환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논다는 것은 일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활동이 되는 것입니다.
놀이를 할 때에 우리는 ‘즐거움’을 찾습니다. 우리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수용체가 있으니 바로 우리의 감각 기관들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피부로 느끼는 가운데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는 행위들을 만들어 내지요.
물론 육적인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정신적인 활동 속에서도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놀이 속에서 남들과 경쟁하고 이기려 하고, 또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고, 다른 존재로 변장을 하기도 하고, 술과 같은 것으로 취기를 얻으려고도 하지요.
놀이는 이러한 것들의 다양한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보다 근본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거룩한 기쁨이 존재하지요. 바로 영혼의 영역입니다. 이 영혼은 세상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 영혼을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 뿐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이 오래 지속되고 반복되면 결국 지겨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세속적 쾌락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영혼의 즐거움, 거룩한 즐거움, 영적인 즐거움은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께서 한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 중독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추구하는 관심사를 들어높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행위를 ‘기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잠시 떼어놓아 하느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상태, 그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기도 안에서 진정으로 쉴 수 있고, 또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기에 이르기까지 우선되어야 하는 작업이 있으니 세상의 즐거움들에서 마음을 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서 쥐고 있는 사탕을 빼앗으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음식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금 맛들이고 있는 사탕을 빼앗는 것을 반기는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는 한 번 맛 본 사탕을 계속 찾으려 하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거부하려 합니다. 마찬가지 일이 우리들에게 똑같이 일어납니다. 천상의 음식이 아무리 향기롭고 영양가가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물든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아이가 사탕을 손에서 놓고 부모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게 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도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있을 수 있고, 맛보기로 천상의 음식을 먹어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본인의 의지입니다. 본인이 그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천상을 향한 그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하고, 보다 참되고 고상한 즐거움을 갈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본인이 그것을 거부하면 아무리 좋은 안내인을 붙여준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에서 벗어나서 천상의 휴식과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끊임없는 피로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지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에 머무르고 가장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반대로 영혼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비록 자신의 육체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하더라도 내밀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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