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부활 5주 목요일 강론


좋은 저녁입니다. 환희는 기쁨입니다. 강론을 시작하기 전에 묵상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제 기쁨을 느낄까요? 어떤 분은 친구가 공짜로 술을 사줄 때에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하하하. 한 자매는 몸매를 이쁘게 가꾸게 도와 주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니까요. 어떤 기쁨이 더 있을까요? 한 남자가 이미 아내가 있는데도 어떤 이쁜 처자가 다가와서 ‘아저씨 우리 행복한 밤을 함께 보내용~’이라고 한다면 그는 기쁨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 성적 흥분으로 인해서 말이지요.

여러분은 왜 여기 있습니까? 무엇을 찾습니까? 미사에 왜 오신 것일까요? 저희들이 가르치는 환희(기쁨)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아직도 제가 말한 것과 같은 종류의 기쁨을 찾으신다면 잘못 찾아오신 셈입니다. 여기는 여러분이 술에 취하고 돈을 더 벌고 더 이뻐지고 아름다워지거나 더한 성적 흥분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은 꽤나 역설적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키며) 여기 우리의 기쁨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십자가가 어떻게 기쁨이 될 수 있지요?”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신은 흐려져 있고 준비되어 있지 않지요. 아직도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은 여전히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지요. 한 여인은 얼굴에 짙게 화장을 하면서 거기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그 여인은 영혼을 가꾸기보다 얼굴을 가꾸는 것이지요. 영혼을 가꾸는 것은 사실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얼굴을 열심히 꾸며서 잘생긴 남성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중요하지요. 혹은 새로운 물건을 구입해서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여전히 낮은 단계이고 지극히 세속적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하는 셈이지요.

복음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과연 요즘 세상에 누가 서로 사랑하고 있을까요? 모두들 ‘거래’를 합니다. 심지어는 부부도 거래를 위해서 같이 살아갑니다. 무슨 뜻일까요? (남편은) ‘내가 너에게 재정을 보장할께 너는 나에게 요리르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다리미를 해줘.’라고 합니다. 이는 거래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거’하는 상태이지요. 왜냐하면 여전히 하느님 앞에 자신의 진실된 의지를 봉헌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하느님은 거의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그저 내가 가끔씩 필요한 마지막 옵션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우리 삶에 근본적인 존재가 아닌 셈이지요. 하느님은 마지막 옵션입니다. 나에게 건강이 사라지고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 청을 드리고 살려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무언가 있고 돈이 있으면 그런 것들에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아직 돈이 있으면 나의 삶을 즐기려고 하지요. 아직 건강이 있으면  아직도 술을 더 마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마지막이었지요. 가장 마지막이요. 그는 결코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저 뭔가 부족할 때만 하느님을 찾았지요.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말이에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혹시 여러분들은 계명을 모르십니까? 우리 10계명을 지니고 있잖아요, 그렇죠? 거짓말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경외하고 주일을 지켜라…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는데에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은 간음을 하고 싶어하고, 다른 여인을 취하려 하고, 다른 이의 재산을 넘보곤 합니다.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주일을 과감히 무시하지요. 주일은 쉬는 날일 뿐입니다.

좋습니다. 모든 계명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하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하지만 우리 서로 사랑합니까? 하하하하. 우리 서로 사랑하나요? 사랑은 커녕 적들이 많고 증오, 분노, 시기에 가득하고, 모두 언제나 다툴 준비가 잘 되어 있지요. 싸우고, 비판하고, 모독할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다. 슬프지만 사실이지요.

왜 그렇게나 다툴까요? 서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이지요? (반어법)
“아이~ 난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어.”
“아니! 내가 널 이길꺼야. 내가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갈거야. 기도하고 경문을 외우면서 말야.”
누가 이렇게 싸웁니까? 하하하. 모두는 돈이라는 이유로 서로 다툽니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다투지요. 혹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싸우지요.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10-11)

지상의 그 어떤 기쁨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여러분이 한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배가 고팠고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잠시나마 욕구를 채울 것이고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8시간만 지나면 다시 배고픔을 느낄 테니까요. 마치 지금 제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의 어떤 기쁨이던지 이와 같습니다. 성적 기쁨은 평생 가나요? 아니지요? 안그럼 왜 그리 불륜이 일어나겠습니까? 술은 평생 가나요? 아니지요? 도리어 건강을 해치고 가족관계를 망가뜨리지요. 그렇다면 어떤 기쁨이 더 있을까요? 행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면 그 기쁨이 평생 갈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 미사를 마치고 나서 한 망자의 9일기도에 갈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죽을 때면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의 육신마저 내려놓고 갈 뿐이지요. 그럼 그의 돈은 어떻게 작용할까요? 아무것도 아닌 셈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어떤 목적으로 살아온 것일까요? 좋은 관을 사기 위해서이지요. 하하하.

우리의 기쁨은 서로 사랑할 때에 진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는지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나를 알려 드리지요.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가리키며) 우리는 이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지요? 수많은 사랑은 거래입니다. 나는 너에게 뭔가를 줄테니 너는 나에게 무언가를 다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내어 주셨고 심지어는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셨지요. 이것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를 실천하시면서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완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영원 안에서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술, 섹스, 재와, 명예, 권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통제하기보다는 그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분은 재화를 즐기기보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슬프게도 아직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는 커녕 우리는 여전히 장님들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가득 채울 기쁨을 찾아 다니는 장님이지요. 그 육신은 언젠가는 무덤 속에서 완전히 파괴될 것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의 영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의 육신이 구더기에 의해서 먹히면서 서서히 썩어가고 있을 그때 그 영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지금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하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예수님의 완벽한 기쁨 속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지금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채우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지극한 어둠 속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구더기와 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은 꺼지지 않고 구더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이가 가슴을 치고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왜냐면 시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수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왔거든요.
‘나는 변호사다. 나는 판사다. 나는 의사다. 나는 남보다 낫지. 나는 박사야. 석사야.’
하지만 그들의 심판날에 그들은 자신들의 가정부가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질투가 얼마나 엄청날까요? 언제나 그 (미천한 이들을) 무시해 왔고 거의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나의 푼돈을 얻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고 그리고 나를 섬기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그들의 심판날에 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욱 고귀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니까요. 반면 한 박사는 엄청나게 어두운 지저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요. 무시하고 소외 시키면서 말입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제 신자분들은 이해를 하시겠지요. 하하하. 모쪼록 오늘 새로 오신 분들 제 말을 잘 들으시고 배우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어디에 진리가 있는지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엄청 속여댑니다. 세상은 우리가 다른 이를 짓밟고 이기고 높이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 된다고 말하지요. 아닙니다. 그거 아세요? 그 누구도 권력가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 누구도 변호사를 사랑하지는 않지요. 누구도 판사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겁을 내지요. 이것이 권력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감사할 줄 아니까요. 부유한 이들은 고맙다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나누도록 하지요. 한국의 아이들은 이미 많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많은 것을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집집마다 하나 혹은 둘 뿐이라서 마치 왕자님이나 공주님처럼 길러지지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를 하고 영상물을 보여주고 아이들을 성심껏 돌보아도 좀처럼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법이 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저 잠깐 강론을 하고 사탕 하나만 나누어 주어도 아이들이 이미 행복해하지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마음의 차이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어떤 것에든 감사할 줄 아니까요. 엄청나게 들여높여진 마음은 보다 나은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감사하다’고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팔이 있고 손가락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셈입니다. 언제 감사하게 될까요? 그것을 언젠가 잃어버릴 때입니다. 언젠가 사고가 나거나 해서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다른 손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기가 힘들어지게 되고 질질 흘리게 되면 그제서야 ‘아, 나는 정말 잘 움직이던 팔을 지니고 있었구나!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감사는 지금부터 여러분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하하. 인간이란 참으로 웃긴 존재입니다. 왜그런지 아십니까? 좋은 것은 다 제쳐두고 그저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일에만 집중을 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지요.
“아! 내 삶은 이따구야. 엉망이야 엉망 엉망…”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선물하셨습니다. 그저 우리가 비극적인 일에만 몰두할 뿐이지요.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나은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적어도 분명히 하나는 낫지요. 제 눈을 보세요. 엄청 작잖아요. 저는 동양인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눈이 엄청 크잖아요. (사람들 웃음) 여러분들은 잘 생겼어요.

오늘 자기 전에 하느님에게 큰 눈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세요. 요셉 신부님보다 큰 눈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하하. 저도 감사드릴겁니다. 왜냐면 저는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하느님에게 이 나라 볼리비아에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것을 체험하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이지요. 어떤 아름다운 체험 말이지요? 제가 시골에 가서 참새 백숙을 함께 나누던 그 체험 말입니다. 얼마나 맛있습니까? 그 음식의 맛이 아니라 사람들의 애정 때문에 말입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집은 다 허물어져 가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저에게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마음입니까. 그러는 동안 부자들은 동전 한 푼 거지에게 주기를 아까워하지요. 우리는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지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