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요한 14,9)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하느님을 ‘가시적으로’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앞에 계신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법은 흰 수염을 달고 광채를 발하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아보는 방법은 하느님의 마음을 가진 이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의 근원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외에 어디 다른 곳에 다른 존재가 선을 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선은 하느님으로부터 등장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이는 같은 하느님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알아봅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는 다른 이를 보면 기뻐합니다.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다른 이들의 손길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하느님의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선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의 제자들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생떼를 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당신을 충분히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표지를 받고 싶어합니다. 적어도 장미 향기 정도는 나야, 적어도 하늘의 구름이 십자가 모양은 되어야, 적어도 성모상이 피눈물은 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지극히 속된 마음이며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당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다가 속임수에 걸려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선과 진리와 사랑과 정의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