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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빌라도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 하려는 이의 특징을 보입니다. 그는 진리를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눈 앞에 일이 성가시고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목적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상대를 심문하고 몰아갑니다. 반면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언제나 솔직한 상대의 생각을 묻고 당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 그 말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내면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그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은 이미 그릇된 일을 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애써 숨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끌려왔지만 당당합니다. 당신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있게 당신이 뜻하는 바를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거짓은 언제나 왕성히 활동하고 자신의 중심생각 없이 주변에서 흘러들어온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입니다. 반면 진리는 언제나 묵묵히 자신을 드러낼 뿐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영원의 진리

왜 우리는 2000여년 전에 죽은 한 인물 때문에 이러고 있을까요? 그분의 존재가치가 무엇이길래 우리는 여지껏 그분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는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한 것일까요?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한때의 흥분상태일 뿐인 것일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부활초를 가만히 살펴보면 제일 위와 아래에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바로 희랍어로 알파와 오메가라는 글자입니다. 이는 희랍어가 시작되는 단어이자 마지막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에도 또 앞으로도 오실 분이시고 그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같은 진리를 전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시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진리를 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기본 구도로 되어 있는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에 동참하는 이는 그분의 힘을 통해서 함께 다스리게 됩니다. 이는 나 자신의 생존만을 염려하고 내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진리와 선을 위해서 기꺼이 수난을 끌어안고 스스로의 목숨을 하느님을 위해서 미워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부활하고 나아가 상급을 받고 다스리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교만했고 저마다 제멋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이 말씀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영원한 권력

이 땅에서는 원하면 하느님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원하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그러한 행동은 지상의 재판대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고 그분의 외아드님을 해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행위들은 합당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권력'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권력 속에서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망각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하느님의 참된 통치'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잘 못 알아 듣습니다. '선이 항상 이긴다'라고 표현하면 조금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니까요. 다니엘 예언서는 바로 그러한 통치, 즉 하느님의 통치를 예언합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통치, 우리는 그 통치권의 수장에게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눈 앞에 보이는 헛된 권력에 속지 마십시오. 그 어떤 막강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한 순간일 뿐입니다. 들에 핀 풀꽃처럼 오늘은 생생해 보이지만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시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 세상의 권력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의 참된 위엄과 권능 앞에 복종할 줄 아십시오.

평화를 알아볼 눈이 있는가?

  예를 들어, 금전적 이득을 갈구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마음껏 돈을 걱정없이 쓸 수 있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평화는 '존재'할까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런 평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도대체 얼마나 돈을 써야 만족할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참된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오감이 만족스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결국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참된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평화가 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이들은 실제 예수님이 바로 곁에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평화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평화를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이 평화인지 모르는데 그 곁에 평화가 지나간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좋은 포도주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선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차라리 막걸리나 한 병 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평화를 알아볼 줄 모르는 이에게는 제 아무리 평화의 가르침을 전해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들은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진 것처럼 그것을 물어뜯고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평화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말하는 깨어있는 종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준비된 태도를 가지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문을 두드리면 쏜살같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 줍니다. 그들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야욕과 탐욕,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낱같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고 싶은 욕구에서 해방되어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이들은 오직 주인의 도...

심는 사람, 뽑는 사람

무언가를 심고 키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심어 놓은 것을 뽑고 망가뜨리는 사람, 나아가 심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은 그냥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수고로 씨앗이 뿌려지고 돌보아지며 오랜 인고의 결과로 열매가 자라나고 수확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국땅에서 지니고 있는 모든 신앙의 씨앗들은 우리 선조들의 피의 순교의 결과이기도 한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 언제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은 심는 데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들지 않으면서 심는 이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세상에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신앙 영역 속에도 공존하기 때문에 그저 성당을 같이 다닌다고 무조건 신심이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비가 땅에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가 닿습니다. 허투루 쓰여지는 빗방울은 없습니다. 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닐 하우스 위에 떨어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비를 받아들일 땅으로 흘러 내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신의 사명을 다 수행합니다. 은총에 목마른 이들은 은총을 받아들이고 기뻐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게 된 기쁨을 나누는 데에 사력을 다할 것입니다. 반대로 훼방꾼들은 훗날 주님이 오실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신뢰하지 않은 그들은 그분의 진정한 힘과 권능이 드러날 때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파견된 자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파견될 차례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이곳에서 꾸준하게 가르치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살이의 멍에'를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해 오던 것을 하는 데에 안락함을 느낍니다. 거기에 어찌나 고착화 되어 있는지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그것이 아무리 본질에 더 가깝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거부부터 하고 봅니다. 율법에 고착화 된 상태, 하지만 갈라티아서가 말하듯이 그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와 인연이 끊겼습니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동습성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을 죽은 것 가운데에서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 제가 말하는 것도 거의 이해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를 올바로 이해하면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그 주변이 바뀌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무르는 이 장소도,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도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을 애착한다고 해도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가 아무리 융성했다고 한들 지금에 와서 그들의 권위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나 잠깐 누렸던 것들일 뿐 지나고 나면 모두 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초전이라는 공동체는 참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모르긴 해도 이 공동체에 예수님이 오더라도 아마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장이 되고 텃세가 생겨나게 됩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들의 속에 가득찬 것으로, 성경에 의하면 탐욕과 사악으로 잔치를 벌이게 됩...

끌림과 거부

법이라는 것은 선을 긋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선과 무관합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국경 안에 들어선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이 있지만, 단순히 그것이 그 사람의 상태를 말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데도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정반대로 이 나라 사람인데도 밖에 나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히려 끌림과 거부에 가깝습니다. 참새가 향긋한 곡식에 끌리고, 무서운 동물에게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처럼 참된 믿음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에게 끌림을 느끼고 하느님 아닌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기서 몸과 영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몸이 끌리는 것은 영이 거부하는 것이고 영이 끌리는 것은 몸이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지키려고 하는 이는 사실은 선 너머에 있는 것에 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끌리지만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는 않기에 그어 놓은 선에서 멈추는 것일 뿐, 근본적으로는 선 너머에 있는 것에 갈증을 느낍니다. 이를 말하는 것이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복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복을 얻기 위해서 때로는 나에게 요구되는 ‘포기’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예수님을 악마가 있던 광야로 보낸 것처럼 때로 우리를 인도해서 시련을 겪게 하더라도 그것을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의 내면의 끌림을 왜곡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는 세속에 끌리는 자들이 신앙에 끌리는 자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비난해서 자신들이 마치 옳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처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속일지언정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가와서 성사의 은총으로 내면의 씻김을 받게...

가르침의 등급

가르침에는 여러가지 등급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대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서로 급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가르침에도 급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속성에 찌든 이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아무리 전해 준다고 한들 졸음이 쏟아지기만 할 뿐 들을 리가 없습니다. 유치원생에게 복잡한 방정식을 가르쳐봐야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혼인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혼할 수 있을까?'를 찾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즉 땅으로 치자면 돌이 많고 단단하게 굳어 있으며 비료도 뿌려져 있지 않은 땅에다가 소금기가 많아 그 어떤 작물도 자랄 수 없는 땅인 셈입니다. 그러니 그런 땅에는 섬세한 영성의 씨앗을 뿌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과거에는 이혼을 하더라도 최소한 이혼장이라도 써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이 무딘 이들에게는 '규정'이 중요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덜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때문에 '최소한 이 정도라도 하라'는 규정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가르침으로 잘 다져진 마음밭에는 좋은 씨앗이 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맑아서 하느님의 가르침이 잘 수용됩니다. 세속성에 찌든 이들은 그들 안에 쌓여 있는 온갖 쓰레기와 먼지를 치우고서야 비로소 가르침이 자리잡을 수 있지만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받아들이듯이 수용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안아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하느님의 품에 안겨 살아가고 그분의 축복을 항상 받고 살아갑니다.

영혼을 접착하다

세상에는 '접착제'라는 게 있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다시 원상태로 붙여 줍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원래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온 같은 질료들입니다. 그래서 원래가 하나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개입해 들어와서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영혼의 접착제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역할을 하라고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따르면 그분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과 이어 주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하나로 이어진 우리들은 지금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하나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럼 반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 친한 듯이 우정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내면 속에 무엇을 감추고 살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의 내면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뒤늦게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 부부 사이에도 서로의 내면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다가 늦게서야 알고 땅을 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서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느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고 그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알기에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분에게 고난을 통해서 완전으로 다가오라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가셨다면 우리라고 무엇이 더 다른 게 있어서 다른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다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연대'라는 개념입니다. 우리와 피조물은 같은 흙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협력자'가 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같은 인간에게서 인간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통해 사람을 서로 동등한 존재로 만들어 내십니다. 두 존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완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창세기는 '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죄는 '파괴'를 의미합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물과 하나로 맺어져 있는데 죄는 그 관계들을 하나씩 둘씩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나아가 인간들 사이에도 서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시대에 와서 부정할 수 없도록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의 주제는 '관계의 회복'에 중점을 둡니다.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회복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이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녀들로써 기쁨을 얻으리라 희망하지 말고 영원 안에서 만날 자녀들, 영적 자녀들을 얻음으로써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루카 복음으로 살펴보는 복음 선포

1. 부르심 먼저는 주님이 부르십니다. 돈을 버는 일이면 우리가 알아서 찾아 나서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사명을 부여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을 부르셨고 사도들이 다른 이들을 부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부르심은 유효하고 우리는 그 부르심의 연장선 속에 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권리와 의무 부여 주님은 일만 시키지 않습니다. 그 일을 실행할 구체적인 능력을 함께 주십니다. 땅을 파라는 이에게 삽을 쥐어 주고 요리를 하려는 이에게 칼을 주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을 고치는 힘입니다.  또한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보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아주 명백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병원을 해도, 학교를 해도 그 근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또한 병자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육체적인 질병도 함께 고쳐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영혼의 질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만날 때에 먼저 내면의 병을 다스리셨습니다. 영혼의 질병, 즉 죄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파견된 이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3. 복음 선포시 지침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지침은 달리 말하면 온전히 하느님에게 의탁하라는 지침이기도 합니다. 부가적으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요소를 빼내는 것이지 모든 것을 없애고 알몸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을 때에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도움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지침의 핵심입니다. 4.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지침 우리는 흔히 착해야 한다고만...

신앙인의 발전 단계와 다양한 유형

처음에는 누구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모르는 걸 어떻게 할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조금씩 기본적인 '가치'라는 걸 배웁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좋은 건 남에게도 좋고 나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다는 걸 배웁니다. 아주 기초적인 윤리관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성이 자라면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 '정의'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법에 따라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영역인 신앙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진 기초 위에 '믿음에 근거한 질서'를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당에 왜 나와야 하는 걸까요? 세상적 가치 기준에서는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기준에서는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지고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신앙인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내던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신앙의 가치를 재면서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신앙의 가치를 내던지는 이들입니다. 보통 성당에서는 이런 이들을 '냉담자', 또는 '쉬는 교우'라고 부릅니다. 물론 냉담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의 비교에서 신앙의 영역에 몸담기보다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낫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변함 없습니다. 이들 보다는 조금 더 나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어두울 수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세속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자신의 놀이터 정도에 그칩니다. 마땅히 다른 더 즐겁고 재미난 일이 없기에 신앙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본격적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특정 영역에서만 신앙인이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 세속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우리가 길거리에서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에 알몸을 보이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상대적인 요소입니다. 한국에서 배를 까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배를 까고 다닌다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과거에는 통통한 여성들이 부의 상징이자 자랑스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의 대상처럼 취급됩니다. 세상의 부끄러움은 세상 사람들의 유행과 변덕에 따라 이리 저리 뒤바뀌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변함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수치스러워 하는 것은 영원 안에서 수치스러운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그분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원 안에서 자랑스러운 일이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최고의 작품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외아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저마다가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이 하느님의 외아들을 달리 받아들입니다. 식당에서 성호를 긋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제가 홀인원 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가 하면, 수도자가 엄청 값비싼 음식 초대를 받았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신학교에서 한 친구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험담하고 다니는 신학생도 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부끄러움일까요? 잘 성...

그리스도의 사랑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말은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다가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고 악인은 언제나 그 희생양으로 동등한 악인을 고르지 않고 의인을 고릅니다. 악인도 악인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알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습니다. 반면 악인은 의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들의 순진성은 악인의 내면에 있는 악을 짐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선한 이들, 타인을 잘 믿어주는 이들에게 사기를 칩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사람도 그 폭력에 쉽게 휘둘릴만한 내면이 약한 이들을 희생물로 삼습니다. 그렇게 의로운 이들, 타인에게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하는 이들은 너무나 쉽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의 희생양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다가오는 위협에 세속적으로 대응을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으로 무기를 만들고 상대의 위협에 그에 상응하는 폭력으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들처럼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약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진정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전부나 다름이 없었고 그 나머지는 얼마든지 빼앗겨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영혼의 고통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우리가 숨쉬고 있는 몸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혼'이 존재하는데 이런 현실에 따라 '행복'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몸과 현세를 위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영혼과 영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고통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프고 현세가 절망적이어서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영혼을 통해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그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은 세상에서 다른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들의 영혼은 영적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대표적인 것으로 '죄책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고 자신만이 아는 일이지만 영혼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죄를 책망합니다. 사실 악인들이 현세의 쾌락에 탐닉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 역시도 바로 이 영혼의 괴로움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을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현세의 쾌락에 몸을 담는 것이지요. 세상에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영혼의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고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두 목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지성이 조금이라도 형성된 어린아이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체는 성체가 뭔지 알아볼 만한 나이면 초등학생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복음의 구절도 살짝 혼란스러워 보일 순 있지만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목숨’이라는 것의 의미만 조금만 설명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 문장 속에서 등장하는 ‘목숨’은 2가지의 목숨을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육신의 목숨입니다. 이는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죽음과 더불어 마무리됩니다. 누구에게는 짧고 누구에게는 조금 더 길 수 있지만,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계가 있는 이 목숨을 누구나 소중히 여깁니다.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어 목이 마른데 병에 물이 얼마 없으면 아껴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 없고 점점 사라져가니 아까울 수 밖에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물을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하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펄쩍 뛸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목숨은 영혼의 목숨인데 이는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 주시는 것인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혼의 목숨은 채워짐과 비워짐이 있고 깨끗해짐과 더러워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목숨을 잃는 것은 영혼이 공허하고 더러워진 상태를 말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영혼이 충만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혼을 채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은총’을 얻어내는 법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원의 목숨을 위해서 현세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법을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

죽은 믿음과 산 믿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자극을 주면 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반응을 하겠지요. 그럼 죽은 영혼과 산 영혼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육체의 경우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합니다. 그에게 영적인 자극, 구원에로의 초대가 왔을 때에 죽은 영혼은 반응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 살아있는 영혼은 반응을 하겠지요.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야고보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잠깐 이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은 영혼은 움직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죽은 영혼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입니다. 반면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도 유념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모든 활동이 믿음의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레지오를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계모임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레지오 모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구성원 사이의 친교만 열심히 다지면서 정작 성모님의 의중은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레지오라면 그것은 믿음의 실천을 하고 있는 레지오가 아니게 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엄청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고 열심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본당이 있을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 돌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건축일을 하는 사목위원이 뒷돈을 욕심내며 본당의 커다란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려고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신앙의 환경을 이용해먹고 있는 것이지 진정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열심해 보이는 외적 ...

수치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사춘기 시절 아이들은 힙합 복장이 유행이었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늘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과거의 행실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참 멋있어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부끄러운 장면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작 당하고 있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잡아 뜯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는 것이 세상에서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저자는 이를 ‘수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당해도 수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저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수치는 하느님 앞에서 ‘불의로운 자’로 판명받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어떠한 수치스러워 보이는 취급을 받아도 그것은 수치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행여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으려고 하면서 하느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일은 이 현세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세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숨겨지는 것이 하나도 없이 우리의 영혼이 빛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

열매

농부가 땅을 경작했다고 해서 그 땅 자체를 열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그 땅에서 생산된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그 땅에 없던 것, 하지만 그 땅에서 생겨난 것을 열매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로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됩니다. 모든 자연은 하느님께 순응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내면의 자유 의지 안에서 말씀을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어 내는 훌륭한 열매를 생산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도 주일을 맞이해서 수많은 본당에서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항하는 마음을 지니고 듣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듣는다 하더라도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들은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를 실행하고는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해서 상당히 바쁩니다. 하지만 그 실행은 바람직한 신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에 고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고아가 의미하는 것은 아버지를 잃은 이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은 참된 아버지인 하느님을 잃은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입니다.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들을 돌보라는 단순한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의 의지가 되는 신앙을 상실한 이들을 돌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면서 영혼의 거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사주를 보고 점을 보고 타로를 보면서 의지할 곳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참된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

단순한 계명

첫 인간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쓰면 '너희는 하느님인 내 말을 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는 바로 이 첫 계명을 어겼고 그 이후로 계명은 복잡성을 더해가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일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엄마 말을 잘 듣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른 것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점 지력이 늘어가고 행동반경이 넓어지면서 이런 저런 것을 건드리면 그때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더러운 손으로 밥 먹지 말아라.' '전선은 건드리지 말아라.' '공공장소에서 떠들지 말아라.'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지 말아라.' 아이들의 가능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지 말라는 범주도 점점 늘어나게 마련입니다. 할 수 있다고,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어도 해 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조심하라'라는 한 마디면 끝날 일들이 이런 것도 해 보고 싶고 저런 것도 해 보고 싶은 마음에 자꾸 세부 명령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같은 식으로 계명의 복잡성도 늘어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계명의 근본에는 동일한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것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수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계명의 근간은 동일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깨어있는 사람이 되면 사실 계명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훗날 영원 안에서 하느님은 '너는 미사 시간 몇 분에 도착했느냐?', '너는 금육일에 소고기가 들어간 국물을 떠먹었느냐?'와 같은 것으로 우리를 조목조목 비난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근원적인 의지를 알고 계시고 바로 그것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위선 - 선을 위장하다

155미리 포병 훈련 가운데에서 여러가지가 힘이 들지만 의외로 성가시고 힘이 드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포를 다 전개하고 마지막으로 '위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애써 포를 방열을 했는데 적군에게 그 즉시 들켜 버리거나 적 항공기에게 들켜서 폭탄을 맞아 버리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를 거의 대부분 덮는 넓은 위장막을 포 위로 얹어서 포를 열심히 숨겨야 했습니다. 상대를 완전히 박살낼 정도로 무서운 무기가 안에 숨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무해한 풀숲이 있는 것처럼 숨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영역 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사실은 모두를 파괴할 요소를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위장막을 치고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위장막은 다른 이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이는 위장막입니다. 마치 하느님에 대해서 잘 알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인 양 거짓된 선으로 자신의 겉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테살 2,2-3)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엉뚱한 것을 복음이랍시고 선포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자신이 교리 신학원을 나왔다느니 교회의 중요 인사와 잘 안다느니 하는 식으로 교회 안에서 나름의 권위가 있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표지로 대신하면서 정작 사람들의 마음에 하느님의 참된 복음이 아닌 '공포'에 기인하는 지배력을 펼치려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거룩함의 표지로 흔히 받아들여지는 요소, 외적이고 형식적이기만 한 신앙의 외적 틀, 사람들의 눈에 띄는 값비싼 봉헌 등의 행위로 실질적인...

바싹 마른 뼈와 같은 가르침

우리는 척추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뼈들이 그 중심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아 나갑니다. 교회의 가르침에도 그 핵심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다른 뼈를 붙여 나가고 살을 붙여 나가면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바라보고 있는 '뼈'들은 우리 교회가 가르치는 수많은 핵심 가르침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싹 말라 사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완벽히 죽은 것처럼 보이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 바싹 마른 뼈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변모하게 되는지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명령 대로 예언자가 예언을 하자 뼈가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힘줄과 살이 올라오고 살갗이 덮이게 됩니다. 마침내 하느님은 그렇게 되살아난 존재에 마침내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현대 사회를 보노라면 마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과 그 가르침은 바싹 메말라가고 갈수록 사람들은 더 줄어들며 희망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뼈들에게 명령하면 그 뼈들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데에는 당신의 명을 받들어 '말씀'을 선포하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가 그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고 하느님의 명령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애를 쓰면 바로 우리를 통해서 교회가 되살아나게 됩니다. 교회는 제3의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교회의 일원,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런 때일수록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 즉 뼈를 붙이고 살을 붙여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다 - 신자들의 이득을 취하고 그들에게서 명성을 얻고자 함. 살진 놈을 잡아먹다 - 믿음이 튼실하던 이의 믿음을 해체함, 인도자의 그릇된 모범으로 신앙을 세속화함. 양 떼를 먹이지 않음 - 신앙인은 참된 신앙으로 성장하는데 그 적절한 양식을 주지 않음. 야픈 양을 고쳐 주지 않음 - 유혹과 죄라는 질병에 시달리는 양에게 적절한 신앙적 조치를 취해주지 않음.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림 - 직무 사제직의 왕권의 본질적 의미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적인 헌신이고 봉사임. 하지만 이를 세속적 의미로 해석하면 동네 권력가, 즉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다스림을 하는 사목자가 됨. 목자가 없어서 흩어짐 - 사제의 내면에 성령을 모시고, 예수님을 참 목자로 섬기고 있어야 함. 예수님이 없을 때에 주님을 찾는 양들은 흩어짐. 반대로 세속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도리어 모여들기 시작함. (술꾼  주변에는 술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식)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됨 - 교회에는 세속성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음. 그들은 항상 먹잇감을 찾아 다니고 그 가운데 가장 손쉬운 먹잇감은 목자가 없는 양들, 즉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양식을 얻어야 하는데 굶주리고 있는 양들임. 이들은 세속성이 가득한 신자들의 이간질에 휘둘리고 그들읭 유혹에 넘어가 엉뚱한 싸움에 휘말리기 쉬움.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맴 - 세상의 여러가지 목적지가 산과 언덕을 형성함. 주님을 찾지 못한 양들은 엉뚱한 목적에 매달리기 시작함. 세속적 신앙 목표에 매달려서 엉뚱한 신심 행위에 시간을 보내고 있음.

진가를 발휘할 때

모든 것은 저마다의 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명조끼는 바다에 빠질 때에야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 이전에는 그것이 그저 귀찮고 성가실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을 마무리하고 영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신앙은 그때에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신앙은 귀찮고 성가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더 향유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고 자꾸만 내가 하기 싫은 무언가를 강요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결국 생은 마무리 될 것이고 그때에야 신앙이 진가를 발휘할 것입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 둔 사람이라면 그 가치를 만끽하겠지만 뒤늦게 부랴부랴 등불을 챙겨든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질 뿐입니다. 물론 신앙이 최종적인 영역에서만 가치를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현세의 삶의 내적인 질을 드높이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작은 기쁨을 더 소중히 여길 줄 알고, 또 허황한 것들을 사전에 차단해서 예방할 줄도 압니다. 지금 다가오는 쾌락을 즐기기 위한 수많은 수단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가 그러한 것을 미리미리 조심하게 해서 그 쾌락 이후에 다가오게 될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사전에 예방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린 시절에 신부님 곁에서 복사를 선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잃을 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허황한 즐거움에 빠져들 위험에서 보호받는 것이기도 한 셈입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근거합니다. 현세의 시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 다만 계시의 진리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을 바탕으로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 우리는 세상의 감각을 벗어버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신앙은 그 감추어 두었던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

여인과 교회

묵시록에서 나오는 여인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나타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딸인 교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오늘 묵시록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 현대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 나타난 표징은 우리에게 드러난 완성된 교회상을 나타냅니다. 이 교회는 태양으로 대변되는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있고 또 발 밑에는 정화의 과정에 있는 교회, 세상에 빛을 보내긴 하지만 태양빛에 비할 수 없는 빛을 주는 달을 두고 있습니다. 머리에 놓여진 관은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인 열 두 지파를 이어받은 열 두 사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완성된 교회상을 대변하는 분으로 우리는 성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범이고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찬란한 외모와는 달리 교회는 지금 아기를 배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은 미숙한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아기가 세상에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기까지 여인은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습니다. 현대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품고 있고 이들이 교회 안에서 충분히 성장하고 온전한 하느님의 자녀들로 완성되기까지 갖은 애를 쓰며 돌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등장하는 다른 표징이 있습니다. 규모에서 압도적이고 색깔은 피와 죽음, 시련을 상징하는 붉은 색입니다. 무엇보다도 '용'이라는 과거부터 무시무시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놈은 머리가 일곱입니다. 머리는 영리함을 나타내고 그 일곱 머리는 악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에 영악함이 됩니다. 뿔은 찌르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 머리들 가운데에 7이라는 충만한 숫자로 대변되는 머리들은 작은 관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충분한 권세와 영예를 향유한 이들을 대변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세상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세력은 언제나 최고의 위치에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힘 없는 이들을 짓밟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내내 있어왔던 일입니다. 이 용은...

악은 선을 싫어한다

선은 악을 보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악은 반대로 선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선과 악이 만나는 곳에는 상호 간에 부정적인 감정이 맴돌게 됩니다. 뇌물을 주려는 사람은 청렴하려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뇌물을 주고 서로 뒤를 봐줘야 일이 수월하게 처리되는데 이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집니다. 하지만 '악'은 뇌물을 주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나쁜 게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올바로 식별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과한 욕심을 부려서 몸에도 좋지 않은 음식을 먹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단호하게 그것을 말리고 있는데 아이는 엄마에게 '나쁘다'고 악을 씁니다. 자신이 욕구하는 것을 못하게 가로막는 엄마가 야속하고 나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엄마가 나쁜 게 아닙니다. 아이의 과한 욕심이 그릇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잡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식별이 없으면 엄마가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습니다. 하느님은 선이고 우리를 빛으로 이끄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은 괴롭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런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어둠에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이끄는 과정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거부할 것이고 반대할 것이고 심지어는 비난하고 험담하고 없는 죄까지 만들어 덮어 씌울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의 입에 하느님의 말씀은 달콤합니다. 예언자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아먹는 말씀은 너무나도 달디 달아 마치 꿀처럼 입에 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말씀을 먹여 주시는 이유는 가서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서 전할 때에 '비탄, 탄식, 한숨'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작은 이들...

빵 먹는 법

빵 먹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간단한 일입니다. 입에 집어넣고 씹으면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빵은 어떻게 먹을까요?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미사에 오면 빵을 줍니다. 물론 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작은 빵이지만 그건 현대의 사목 환경에 따라 변화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줄어든 것이고 옛날에는 정말 빵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사에 오면 배불리 빵을 먹기도 했습니다. 육체를 먹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빵이 있으면 먹으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이 빵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는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영혼이 빵을 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배움이 필요한 일입니다. 빵은 입으로 먹는 것처럼 영혼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입'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소식을 전할 때에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가 하는 말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에 대해서 신뢰가 존재하는 사람, 즉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뢰, 믿음은 상대가 전해 주려는 내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훌륭한 수용체, 즉 영혼의 입이 됩니다. 따라서 생명의 빵은 비록 우리의 몸에 달린 입으로 먹지만, 사실 영혼의 입으로 먹어야 하는 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고 그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그분과 친교를 쌓아야 하고 그분이 진실된 분이라는 것을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빵을 먹게 만들고 우리에게 그 빵의 효과를 보게 만들어 줍니다. 현대에는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빵을 아무리 먹어도 몸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영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갈수록 쇠퇴합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의 구조...

성령을 슬프게 하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분명히 성령의 인장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선한 일이고 무엇이 악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혼 도장 찍었다고 바람피우지 말라는 법이 없듯이, 이런 우리들이라고 해서 악을 저지르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원한 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극단적인 하나의 증상은 밤에 잘 자는가 하는 것입니다.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그 꾸준한 내면의 증오로 인해서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위와 관련해서 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격분 폭발하는 분노를 말합니다. 마치 풍선이 작은 바늘 하나에 터져 버리는 것처럼 그 내면에 응축되어 있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가 폭발시켜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사실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뭔가 일이 잘 안풀리고 그것을 스스로 해소해 나가지 못하는 이에게서 쉽게 드러납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삶의 소소한 영역에서 쌓아놓은 화를 격분을 통해서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분노 분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노는 불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정당한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통상적인 분노는 '의로움'에 기반한 분노이기보다도 내가 당하는 섭섭함에서 기인하는 분노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말 선과 사랑을 수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하느님의 의로운 분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부모 자녀에게 가지는 섭섭함에서 기인하는 분노입니다. 이는 이기적 분노이고 죄가 됩니다. 폭언 우리는 대화를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서로 그릇되이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에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이 잦습니다. 폭언이라고 '고함' 지르는 것만 연상해서는 ...

일어나 먹어라

충분함의 선택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미숙한 이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점검을 바르게 하지 못합니다. 어느 정도의 사탕을 먹어야 적당한지 어느 정도의 힘든 상황을 내가 견딜 수 있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작정 사탕 그릇에 있는 사탕을 다 주워먹어 버리기도 하고, 또 높은 나무에서 무모하게 떨어지다가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은 언제 마무리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우리는 힘들 때는 그만 멈추어 달라고 하고 좋을 때는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의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충분한지 아닌지를 아십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이득과 연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섭리는 타인의 구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부모님은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의 여부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사랑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부모에게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영향력 때문에 지상에서 이미 마치고 싶은 삶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천사는 먹으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은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천사가 주려는 빵은 '의지'의 빵입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이 남았음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내면에 작용하는 의지의 음식, 즉 은총은 그를 상상하지 못할 일을 하게 도와줍니다. 엘리야는 하룻길을 걸어 광야에서 죽을 것 같았는데 천사가 주는 빵을 먹고는 사십 일을 걸어갑니다. 물론 사십이라는 숫자는 언제나 정화의 시간, 참회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을 살면서 때로 많은 경우에 '삶'을 즉, 선을 향한 의지를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영리해서 그들의 꾸준한 공격에 의지가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은총의 양식을 먹이시고 우리는 그 힘으로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습...

관계의 정의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일단 나를 낳아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에 우리는 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모'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낳아준 부모가 있는가 하면 길러준 부모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선을 더 넓히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원적으로 '인간'이라는 고차원적인 존재를 낳아주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세상에는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흔히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살아가면서 내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고 내가 의도해서 관계를 형성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닫힌 사회 속에서 주어진 관계 속에서 친구를 형성합니다. 시골 같은 지역은 다른 친구를 만날래야 만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점점 내가 선택하는 친구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계를 신앙 안에서 다시 점검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살면 당연히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같은 동네에 살면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관계의 근본을 의심하게 만들어주고 또 진정한 가족, 진정한 친구,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되새겨 주십니다. 아무리 피로 맺어져도 헤어질 관계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어떤 것도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보다도 더 끈끈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참된 아버지이신 한 분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가족을 이룹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이면 누구나 가족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관계라면, 세상에서 그 관계가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

목자 없는 양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마르 6,34) 당대에 목자가 없지 않았습니다. 즉, 회중을 영적으로 이끌 직무를 가진 이들은 넘쳐났습니다. 마을 곳곳마다 회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회당장이 있었으며 이스라엘 전역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양들을 이끌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특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환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를 올바로 이해했고 이해하면 할수록 그분의 말씀에 더 목이 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사막에서 목마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을 받아마셨고 그분이 가는 곳을 뒤따라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육로로 시간이 걸리는 길을 빠르게 가려고 배를 타고 가는 예수님의 일행을 육로로 달려가 따라잡을 정도이니 그들의 열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제가 있는 본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서 제가 느끼는 바입니다. 오죽 목이 마르면 이 초전이라는 곳에 미사를 드리러 오시겠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교통비를 준다고 해도 가기 귀찮은 거리를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미사 한 대를 드리러 먼 길을 마다않고 오시는 분들을 보면 사실 감탄이 절로 나고 가엾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평소에 충분히 먹고 있다면 배고프지 않을 테니까요. 현대 교회는 목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문 지상에 때로 사제 '면직'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도 아직은 거뜬합니다. 사제는 여전히 많고 본당은 부족해서 많이들 특수사목으로 빠지고 보좌 신부가 주임이 되기에는 여전히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판입니다.  하지만 목마른 양들 같은 이들도 많습니다. 자신이 있는 신앙 환경에 실망해서 신앙에서 멀어져서 바깥에서 영혼의 위로를 갈구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당은 나가지 않는데 사주나 점을 보러 다니는 이들은 넘쳐납니다. 요가와 명상을 신앙 대체품으로 삼는 이들도 많...

순명 - 주님의 뜻을 찾다

그리스도교의 구조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그 반대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그 방향을 설명하고 초대해야 합니다. 이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한 사실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 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목적지가 같다면 출발지가 달라도 결국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평화'가 존재합니다. 마지막 목적지에 대한 동의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돕기도 하고 필요하면 끌어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면서 길을 걸어갑니다. 서로 조금 다를 뿐, 마지막에 만날 것을 알고 있기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각자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 만나더라도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움직임에 반대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바로 1독서의 흩어 버리는 목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양들을 모으는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세속적인 사고 속에서 양들에게 이득을 취하고 정작 그들을 먹이거나 돌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언뜻 굉장히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세속적 사고를 불어넣고 이간질을 조장하여 서로 다투고 싸우게 만드는 부류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평화라는 것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서로 뒤를 봐주는 이해관계에 얽매인 이들은 언뜻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언제라도 서로 수가 틀리면 머리 끄댕이를 쥐고 싸울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불편함도 견디지 못하면서 지극히 신경질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자와 양

 기본적인 질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목장에는 양떼가 있고 주위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바깥에는 이리떼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질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목장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양이 있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양들을 공격하는 이리가 있기도 합니다.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벗어난 양떼를 모아들이고 이리떼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자들 가운데에는 주님의 양떼를 파멸시키고 흩어버리는 목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양들의 유대를 끊고 어둠의 요소를 끌어 들여 선한 양들을 흩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목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그분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선한 영혼들에게 빛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마음 속에 탐욕과 이기심이 가득한 이들, 사람들을 이간질 시키고 교만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질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내비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예언자들이 하는 일이고 그들은 바로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역으로 울타리 안에 이리떼를 끌어들여 선한 양들이 쫓겨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어린 아이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올바로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쁜 것을 좋은 것인 줄 알고 입 속에 집어넣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로 믿기 위해서는 올바른 식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을 나쁘다 하지 않고 나쁜 것을 좋다고 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미움을 받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2역대 24,19) 신앙은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본 구조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피조물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순응'하도록 창조되었고 자연의 질서에 따릅니다. 다만 인간은 그 내면 속에 더 귀한 것이 있어 보다 드높은 가치를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간단한 구조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그릇되이 사용함으로써 죄를 짓게 되고 세상에 복잡함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원래 창조된 종이는 깨끗한데 그것을 구기고 찢으면 복잡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그 순수한 내면의 욕구 속에 하느님을 찾도록 되어 있는데 세상은 온갖 복잡한 요소로 인간의 내면을 찢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런 인간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예언자들은 현재 진행중인 사람들의 내면의 혼란함을 거슬러 예언을 하도록 사명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달갑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 그들이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흔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거스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반갑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부감이 느껴지고 그 말을 전하는 이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듣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욕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말들입니다. 돈을 더 벌게 해 주고, 성공하게 해 주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쥘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더 달갑게 들릴 뿐, 하느님을 알게 해 주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도록 해 주고, 그것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들은 그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 같은 말들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선포하...

혼돈의 세상

세상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짜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과학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정확성은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이루어져가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은 혼돈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외부적 질서는 과학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그것을 움직이는 힘은 내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내부의 힘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에 기인하고 그 욕구들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사실 '혼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을 살아가는 이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대상으로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혼돈의 세상 가운데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이 강조하는 질서의 밑바탕이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세상의 이유 속에서 다른 가치들은 모두 무의미하게 변해 버립니다. 세상은 그것을 질서라고 여기고 그 질서를 바탕으로 보다 더 잘 먹고 사는 것을 가장 근원적인 가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헌데 신앙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엉뚱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코린토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코린 5,15)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 지금껏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신앙은 우리에게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무엇을 위해서 살라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진리가 도리어 혼돈처럼 느껴집니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무엇이 혼돈이고 무엇이 질서일까요? 체계적...

진정한 질서

성경 속에서 곧잘 물이라는 것은 '혼돈'이나 '혼란'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영성적인 면에서 물은 곧 세상의 혼잡한 정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그 세속이라는 물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곧 영혼의 죽음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바다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서 그것을 당당하게 뚫고 지나갑니다. 하느님은 그런 혼란함 속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질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집니다. '구름'이라는 것, '먹구름'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비정형'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어떻게 도구처럼 다룰 수 있을까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구름이 옷처럼, 먹구름이 포대기처럼 간주됩니다. 혼돈이 가득한 가운데 하느님은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관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속성은 우리의 '신앙'이라는 질서를 망가뜨리려 합니다. 이 혼잡한 세상 속에서 결국 세속의 강한 힘에 기대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리를 더한 혼란으로 밀어넣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혼돈의 힘에서 나오는 것은 결국 혼돈일 뿐입니다. 강한 파도는 커다란 배를 순식간에 파괴해 버릴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 역시도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혼돈의 결과일 뿐입니다. 참된 질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올바른 경계를 아시고 그것이 멈추어야 할 때를 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가 진정한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참된 질서는 인간에게 '안정'을 허락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지상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박해를 당해도 결국 그 내면에 '평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런 그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의 힘은 아무리 겉꾸민 평화를 드러내고자 해도 결국 그 내면에...

영혼의 능동성

영혼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영혼은 능동적입니다. 영혼은 그 능동성의 바탕이 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를 바탕으로 주변을 관찰하고 식별하며 수용하고 판단하고 실행합니다.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를 상상해 봅시다. 땅에 떨어진 반짝거리는 물건을 보았을 때에 그 아이는 사탕인가 싶어 쪼르르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탕이 아니라 다른 돌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실망하고 그것을 내팽개치고 다시 가던 길을 갑니다. 그 아이의 내면 속에 사탕을 향한 갈망이 그 아이의 행동을 좌우한 셈입니다. 만일 수석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는 주변의 돌들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방금 아이가 내버리고 간 돌을 유심히 바라보고 그 안에 새겨져 있는 무늬의 독특함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돌을 보석처럼 지니고 가서 가장 고귀한 곳에 잘 장식해 둡니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돌에 대한 의지가 그의 행동의 세밀한 부분을 결정한 셈입니다. 우리의 눈은 ‘감각기관’을 대변하며 영혼이 들고가서 요리할 것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헌데 눈은 순진하게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안에 선재하는 요소를 바탕으로 시선을 둡니다. 그래서 눈이 등불이 됩니다. 나의 눈을 어디로 향할 것이며 무엇을 바라볼 것이냐에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가져와 식별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가 결정됩니다. 그 영혼 안에 ‘어둠’이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둠으로 가득한 영혼은 주변에서 자신의 어둠의 욕구를 채울 것들을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는 더 큰 어둠을 끌어 들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험담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거짓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의 주변에 그런 요소를 전해주는 이들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아들인 부정적인 요소는 그를 더욱 어두운 의지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영향력

초등학생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걸 자랑한다고 그 영향력이 크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주변의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말겠지요. 하지만 유명 연예인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를 동경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런 그를 무턱대고 따라하려고 할 것이고 실제로 그런 엉뚱한 행동들은 소위 무슨 무슨 챌린지 형태로 확산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은 그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지도자가 그릇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영향력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는 어르신들은 '삶의 지혜'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대단했고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엘아자르라는 율법학자와 같이 자신의 소소한 행동에 책임을 져서 차라리 매를 맞고 죽는 결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르신들이 가지고 있던 그 영역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릇된 표양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더럽히기까지 합니다. 공공기관에 와서 나이 많은 것으로 고함을 질러 댄다거나 자신에게 조금만 섭섭한 것이 생겨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 모습들이 흔하게 발견되면서 이제는 그 누구도 어르신들에게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하면 피하고 멀리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두 종류의 어르신이 있으니 그저 나이만 더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 삶의 지혜를 더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의 지혜는 오랜 숙고와 인내, 겸손과 온유, 무엇보다도 참된 믿음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의 삶을 바라보면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 나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지혜와 은총 속에서 살아가려는 열망을 키워간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보석이 굳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노년의 지혜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 빛나는 보석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찬란한 보석이 오랜...

착한 목자

신학교 시절 '작업' 시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들이 수가 많았기 때문에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가꾸는 작업들에 동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작업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자주 했던 일은 신학교 정원에서 자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잡초를 뜯다 보면 때로는 그 뿌리가 어마어마한 것에 놀라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커다란 잡초를 뜯다가 잔디도 같이 뜯기는데 잔디는 위에서는 저마다 작은 풀처럼 솟아나 있지만 아래에서는 서로 강한 줄기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서로 강하게 연결된 잔디처럼 우리 역시도 한 주님에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들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는 것은 그 내적인 유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발가락과 손가락이 우리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것처럼 하느님을 믿는 이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아버지와 그리고 우리의 목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요한 10,14) 젊은 시절 술자리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그렇게 밤늦게 모여서 서로 우정을 다지는 것이 엄청 중요한 일이었고 그렇게 형성된 우정이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 달라지면서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졌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나도 평생을 만나 온 것 같이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사는 곳이 다르고 출신지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내면 속에 같은 떨림, 진동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같은 양들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당 사람이라고 모두 같은 양 떼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단계를 하면서 그 수단으로 성당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세속적 목적으로도 얼마든지 성당을 다가서는 사람은 있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는 이라야 한 목자 아래에 있는 한 양 떼가 될 것입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에는 아직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

세상은 그분을 안 적이 없다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토록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한 마디의 말이나 단 한 번의 경험은 평생을 두고 그에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은 하느님 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 사람은 그 체험을 평생을 두고 기억하게 되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만한 하느님의 체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딱히 기억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기억은 세속의 삶에 기반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라고 부를 만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당을 다니는지 안 다니는지, 혹은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가 그 체험의 기준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성당 안에서도 얼마든지 세속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은 성당 안에서 자신이 원하던 형태의 것이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성당을 다닐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냉담에 빠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러 왔는데 커피가 다 떨어지면 거기에 있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요. 하느님의 체험을 한 이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의 형태를 유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삶이 분명합니다. 일요일에 집에서 쉬어야지 왜 쉬는 날까지 성당에 가야 하는지 세상적인 기준에서만 보자면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과거에는 성당에 가면 현세적으로도 즐길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이유들이 더욱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굳은 '믿음'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

성소(聖召) - 거룩한 부르심

성소(라고 하면 신자들은 대부분 사제 성소나 수도자 성소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성소는 어찌보면 결혼 성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7성사 가운데에는 친교에 봉사하는 성사로 혼배와 성품 성사가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것만이 성사, 즉 거룩한 일이 아니라 혼인 생활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혼인이 성사인 이유는 그것이 부르심 받고 응답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개인이 서로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신앙인으로 이 땅에서 완수해 나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혼인 생활에는 좋은 것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혼인 생활은 배우자가 죽음으로써 마무리되기까지 지고 가야 하는 거룩한 사명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강림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신 소명을 이행합니다. 오늘 독서의 그의 말 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하는 문제로 인해서 법정에 서고 신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옥에도 갇히고 박해도 당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풍조가 있고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꺼리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사회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쉽지 않은 일로 만드는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혼인 성소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혼인은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일종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고자 애쓰는 이는 어떻게든 이 소명을 받아서 살아갈 것입니다. 혼인은 단순한 애정의 끌림이나 현실적인 계산이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혼인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영혼의 질병이 어려운 이유

몸이 아프면 즉각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치유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사라는 직분에 대해서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프던 몸이 그를 만나고 나면 개선되는 것이 체험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질병의 문제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 영혼이 세속이라는 가치에 물들어 화장을 한껏 하고 그걸 인스타에 올리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아이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나이대에 그럴 만한 일이라고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신에게 값비싼 선물을 해 주는 기준으로 식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알아볼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재산상의 문제가 생겨서 형제간에 싸움이 나도, 누군가에게 극도의 시기를 느껴서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며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아픈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안다면 치유하고 싶어질 것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은 유대인의 핵심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운 율법의 아들이고 자신이 하는 행동은 그 자랑스러움을 더해주는 훌륭한 행동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스스로 아프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도리어 자신이 하는 일을 뿌듯해 하고 열정과 더불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고을마다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필리포스는 당대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의 구역이었던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필리포스는 사람들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중풍 병자와 불구자를 낫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고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로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내 ...

반대하다

반대하다, 반항하다, 반기를 들다 모두 비슷한 표현입니다. 누군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역행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독서에서는 스테파노와 그에 대항하는 이들이 등장을 합니다.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고 표현됩니다. 백성은 평범한 사람을 말하고 원로는 명예로운 이들을 말하며 율법 학자들은 학적 권위를 지닌 이들을 말합니다. 이 세 계층이 하나도 예외 없이 스테파노에게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강하고 광범위한 반대 속에서 스테파노는 용기를 잃을 법도 한데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스테파노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그 시작점에 내적인 반대가 선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외적인 형태의 악은 이미 그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진리에 대한 반항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쫓는 사람들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부류는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욕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복음에서도 유사한 대립구도가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진정한 빵을 주시는 분'을 소개하고자 하고 군중은 '빵'을 섬깁니다. 그래서 둘은 '빵'이라는 유사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셈입니다. 군중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세속의 빵을 예수님께 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에 이끌어 줄 하늘의 빵을 받아 먹으...

무엇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것인가?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막달레나의 경우는 눈물에 눈이 가려서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그들과 한참을 걸어가는 데에도 알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외적 용모로' 알아보는 일은 쉽지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그의 외모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 습성과 말투를 통해서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알 수 있도록 구멍난 손과 말을 보여주시고(외견의 유일한 남은 징표) 나아가서 부활하셨음에도 그들 앞에서 구태여 먹을 것을 찾아 물고기를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보는 일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영으로' 누군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에 힘입은 이들은 '동일한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드러납니다. 먼저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와 완성에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성경에 기반한 복음의 핵심 선포를 가르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세번째는 진리의 선포, 즉 선교에 대한 노력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선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셈입니다. 사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더이상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서 멀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십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협조자의 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앞서의 의지를 담...

계명을 지키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 2,4) 우리가 훗날 가게 될 하늘 나라는 간단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완전한 방법은 그 집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가는 사람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다양한 표현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이렇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양자로 편입되어 식구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문제는 서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근함', '친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라고 할 때에 그가 천주교 신자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교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고, 가톨릭 문화나 신학적 지식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필요한 일이고 하느님은 전혀 다른 것을 보십니다. 하느님은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내면을 관찰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친교가 얼마나 형성되어 있는지를 바라보십니다. 그것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율법 규정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지키는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계명을 근본적으로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가장 내밀한 영역에 얼마나 진정으로 동의하는가 하는 것, 즉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도 없으면서 친한 시늉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과 진실한 친교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훗날에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당신의 집에 그분의 아들과 딸로 들...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사도 3,14-15) 사람은 복잡한 것 같아도 단순합니다. 저마다 '욕구'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다양한 차원에 걸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빵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즉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됩니다. 그래서 사탄도 예수님을 빵으로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고차원적인 욕구가 존재합니다. 명예와 관련된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것입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설령 밥을 안 먹어도 내가 지금껏 쌓아 온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못견디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아가 악마는 결국 '나자신'이라는 것을 숭상하도록 합니다. 최종 권력에 대한 욕구를 바탕으로 한 유혹이자 하느님을 앞에 둔 인간으로서 갖게 되는 유혹을 의미합니다. 첫 인간이 걸려든 유혹이기도 합니다. 이런 다채로운 종류의 유혹들 앞에서 인간은 '의로우신 분'의 초대와 그분에게서 얻는 진정한 영광,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분 자체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리를 죽이는 방식이며 생명의 영도자를 죽이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압니다. 하느님은 죽은 그분을 당신의 권능으로 살리시고 다시 우리 앞에 내어 놓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이끌림에 따라서 영원을 저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느님을 향한 꾸준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미 우리는 선택한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사도 3,19) 

본당 축제 계획

본당 축제를 계획해 봅시다. 일단 잘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배고프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잘 먹어야 하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뭔가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돼지국밥과 수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려면 선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거저 받는 것이어야 하고 나름 가치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받아서 오히려 쓰레기밖에 되지 않는 것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치로운 선물을 준비해야 하고 또 기왕이면 그 가치가 평소에 내 능력으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 집무실에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경품이 한가득 쌓여 있습니다. 흥겨운 것들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풍악과 놀이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신나게 즐길 수 있는 한바탕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즐겁지 않으면 축제가 아닙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들이 한바탕 풍악을 울릴 것이고 저마다 팀을 나눠서 윷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것으로 주님의 부활 축제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느님 축제의 먹거리 하느님은 우리를 잘 먹이시려고 합니다. 당신의 곳간에는 은총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언제나 다가서면 창고가 열리고 먹거리가 넘쳐 흐릅니다. 특히 미사 중에 다가오는 말씀의 음식과 성체의 음식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배불립니다. 우리는 잘 먹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도 희망도 사랑도 성장합니다. 2. 하느님 축제의 선물 하느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 하늘 나라의 선물을 준비하십니다. 이는 현세에서 우리 스스로가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가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고 영혼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선물입니다. 3. 하느님 축제의 기쁨과 행복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의 가장 기초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쁨과 행복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좋은 곳에 아니라면 애써 갈 필요도 없습...

살아계신 분을 죽은 것 사이에서 찾지 말아라

닫힌 줄 알았던 돌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하얗고 긴 겉옷은 신앙의 상징입니다. 혼인 잔치의 예복이기도 하고 수난 자리에서 도망가던 이가 흘려버린 옷이기도 합니다.  그 젊은이가 전하는 메세지는 살아계신 분을 죽음의 장소에서 찾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분을 만나기 위해서 그분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닫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분을 열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할 것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면서 문을 열어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했던 단 하나의 일은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매우 큰 돌이 이미 다른 힘에 의해 열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리라 기대하는 장소에서 우리는 메신저를 만날 뿐입니다. 하지만 메신저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은 젊습니다. 영혼의 상태는 외적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은 젊어집니다. 반면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모든 게 다 똑같다고 자포하는 사람의 영혼은 늙은 영혼입니다. 누구나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는 젊은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스스로를 늙은이로 규정하는 교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살아계신 분은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계시는 분은 이 곳에 계시다가 저 곳에 계실 수 있는 분입니다. 죽은 사람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리 저리 옮겨다니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은 자칫하면 죽은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예수님을 다채로운 환경에서 마주합니다. 하지만 죽어있는 신앙은 언제나 습관처럼 하는 일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미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시는 분이시기에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다가 또 저곳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전해주는 메신저의 목소리, 즉 젊은 영혼을 지닌 이의 목...

파스카 만찬 해설

희생양 우리의 죄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죄를 대신 짊어질 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신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먹는 양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허락된 양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총도 마찬가지이니 저마다 허락된 수준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체를 모셔도 누군가에게는 죽기 직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모시는 성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흘려버리는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은총이 온다고 모두 선물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에 알맞게 주어집니다.  피와 두 문설주와 상인방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은 죽어야 하고 오늘날의 희생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세상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는 가로대와 세로대에 발라집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삶에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밤에 먹다 밤은 빛이 꺼진 시간을 말합니다. 배가 부를 때 밥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린양은 이 은총의 빛이 꺼진 듯한 현세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이라는 시련의 시간 속에 성체라는 어린양을 먹음으로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불, 누룩 없는 빵, 쓴나물 불은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열정에 상응하는 뜨거운 시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지독한 수난을 거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입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허영이 없는 영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에 사실 누룩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부풀리는 것은 여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룩 없는 빵은 우리의 생의 시간이 사실 얼마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계획을 여전히 세우지만 하느님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