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산 안또니오 로메리오 여행기2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렀습니다. 나가려던 시청 구경은 점심 시간이라고 안되겠다고 해서 그냥 있다가 혼자서 동네 산책을 나갔습니다. 동네라고 해 봐야 위아래로 네 다섯 블록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 작은 동네입니다. 사람들도 낮 시간에는 다 일하러 나가고 없어서 만날 수 있는 이들도 거의 없었고 그저 우물 퍼로 온 동네 아낙들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동물들을 참 많이 만났지요. 돼지, 닭과 병아리떼, 말, 온갖 새들…

그날 저녁에는 후배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미사 직전에 성당에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조르르 몰려와 안겨듭니다. 그리고 미사 준비하는 청년들도 왔고 수녀님들도 오셨지요. 그래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수녀님과 청년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이 어떤 행사에 대해서 작년에도 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에 대해서 수녀님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곧잘 관례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 혼배를 하는 것도 아이가 3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내가 여기 2년 넘게 살고 있는데 그런 관례에서 벗어난 경우는 딱 하나 밖에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작고 협소한 동네이다보니 자신들 안에 형성된 관례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는 모양입니다. 자신들만의 룰이 있고 그것을 깨는 것을 큰 위협으로 간주할테지요.

어제는 아주 조용한 하루였습니다. 일어나서 아침 먹고 쉬고, 점심 먹고 다시 쉬고 하는 일상이었지요. 사실 점심을 먹고 나서려고 했는데 후배 신부님이 좀 더 머물다 가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져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물론 제가 귀찮아서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하느님이 왜 저를 남겨두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두 신부님이 모두 저에게 고해성사를 보았거든요. 오지에서 일하시는 신부님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의 선물을 잔뜩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맑아진 마음으로 더욱 기쁘게 일하실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지요.

어제 저녁에는 신부님 두 분이 공소 미사를 나가고 동네 청년 둘과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저런 질문을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저의 신앙교육에 대한 열의가 발동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은 ‘발전’한 나라냐고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 가치의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니란다. 그에 상응하는 내면의 가치도 함께 성장을 해야 진정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이 내적인 가치가 하나도 없이 돈만 진탕 벌어들인다면 그 돈을 제멋대로 쓸 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과 타인의 삶을 망치게 되지. 오히려 적게 벌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지닌 작은 것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게 진정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어. 이곳 산 안또니오 로메리오에서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너희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놓은 셈이야. 그러니 단순히 돈이 많다는 것, 문명의 이기가 많다는 것을 발전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도록 해. 사람은 내면의 가치가 자라야 진정한 발전을 이루는 거란다.”

“얘들아, 너희들이 물질적인 것에 호기심을 갖고 신기한 것을 찾고 하는 것은 정상이야. 하지만 그만큼 내면적인 것도 잊지 말거라. 그리고 실제로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 돈을 많이 번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란다. 누구는 돈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살겠지만 그 안에서 자신의 성실성과 신의, 책임감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고, 또 다른 누구는 그런 문명의 이기가 없는 곳에서 태어나지만 그 안에서 성실성과 신의, 책임감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야. 그러니 오늘 너희들이 나에게 대접해 준 이 저녁식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란다. 그러한 내면의 가치를 읽는 너희들이 되었으면 좋겠어.”

직업병이지요. 하하하. 기회가 좋든 나쁘든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것이지요.

저녁이 되어서 후배 신부님이 소 간과 김치를 볶은 맛난 안주를 마련하셨고 맥주 한 캔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선교지의 여러가지 어려움을 들을 수 있었지요. 물론 저도 겪은 것이지만 후배 신부님의 입장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언어’이지요. 언어의 장벽이라는 것은 자신의 성격이 아무리 외향적이고 좋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안통하는데 한국에서 하던 아무리 쉬운 표현이라도 여기에서는 일단 한번은 막히는 기분이 들게 되지요. 그런 가로막힘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펼칠 수 없으니 심적으로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후배 신부님의 고충을 들어주는 사이 시골 공소 미사를 마친 선배 신부님이 들어왔고 모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렇게 밤은 깊어 마무리를 하고 서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수녀님들이 아침 식사를 마련해 주신다고 하네요. 이제 그것 먹고 힘내서 열심히 운전해서 제 본당으로 돌아가야겠지요. 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을테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