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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례 상담

오늘은 사무실에 근무를 서는 날입니다. 사무장이 저를 찾습니다.

- 신부님, 어떤 자매가 세례 관련해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네요.

- 그래요? 어디 한 번 만나 볼까요?

한 자매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미소 지으면서 다가가서 뭐가 궁금하시냐고 물었습니다.

- 내 아이 세례를 주고 싶은데요. 대모가 견진을 받지 않았어요.

- 아, 그래요? 내년에 성인 견진이 있으니까 준비하셔서 받으시면 됩니다.

- 근데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예요.

- 네? 그러면 대부모로 받아들이기 곤란한데요. 왜냐면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대자녀들을 이끄는 사람이 된다는 말인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가톨릭 신앙의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 하지만 우리 아이 고모인데요.

- 거듭 말씀드릴께요.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의 친분 관계나 재력과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대부모가 된다는 것은 가톨릭 신앙의 전수자이자 보호자가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최소한도로 가톨릭 신앙을 지닌 이어야 해요. 그리고 그 밖의 요구사항도 보는거지요. 견진을 받은 성숙한 신앙인인지, 누구가와 함께 살고 있다면 혼인성사의 은총 안에서 살고 있는지 말이예요. 가톨릭의 규정들은 귀찮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 안되겠다며 방금 등록한 거 환불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 네, 원하시면 돈 되받아가시면 되어요.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은 아이의 세례에 대한 책임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이라는 거예요. 자매님 본인이 이 세례 여부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단순히 원하는 사람이 대부모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고를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이 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매님이라는 걸 알아두셔야 해요.

결국 자매는 환불을 받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조금은 짜증이 난 표정이었지요. 그래서 그러시라고 내년에도 세례는 매달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사무실로 돌아왔지요. 헌데 잠시 시간이 지나 그 자매가 제 사무실로 다시 슬그머니 들어옵니다.

- 혹시 견진을 받지 않은 청년도 대모가 될 수 있나요?

- 음, 그 경우에는 가까운 시일에 견진을 받겠다는 구두약속을 저에게 하면 제가 허락해 드리지요. (볼리비아 교회는 대부모가 견진을 받도록 ‘강하게’ 권고합니다.)

- 그럼 첫영성체를 받은 17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세례 대모가 될 수 있는 거지요?

- 네, 저에게 와서 다가오는 해에 견진을 받겠다고 약속하면 제가 허락해 드립니다.

- 알겠습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기쁜 얼굴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인내와 온유와 겸손이 필요한 일이지요. 설령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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