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부자와 맞선 복순이네3

부자는 그렇게 원하던 것을 얻어 왔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부인이 따라 들어오면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보 그거 아세요? 복순이네가 돌아왔다는구려?”

“뭐야? 그 괘씸한 놈들! 도대체 왜 또 들어온거래? 내가 그놈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봤는데!!!!”

“듣자하니 박대감네 일꾼으로 들어왔다던데 당신 오늘 거기 다녀오지 않았수?”

“뭐야?!!!!! 제길, 날 봤겠구만. 날 봤을거야. 이게 무슨 창피래 그래. 하지만 거기 재산 담당하시는 분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어. 보라구 나에게 이렇게 재산을 빌려 주시지 않겠나?”

“그 참 다행이로군요. 이걸로 우리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볼 수 있겠구려.”

하지만 빌려온 부자의 재산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낭비벽이 심했고, 자식들은 도박에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부자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아내와 자식들의 행태에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박대감네 집에 찾아가야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이번에도 부자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안으로 맞아 들였지요. 부자는 황송해 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순이네는 차를 내오라 하고 부자를 극진한 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으리 송구스러운 일입니다마는… 한 번만 더 출전을 해 주실 수 있으시련지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헌데 지난 번에 내드린 건 어찌 쓰신 건지요?”

“이러 저러한 일에 투자를 하다보니 그만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복순이네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의 가정 상황이 어떤지 말이지요.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르는 척 속아 주기로 합니다.

“그렇군요. 다시 한 번 빌려 드리지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적은 돈도 아니고 이렇게 아무 보증도 없이 빌려 드리는 건 저희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달리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요?”

“나으리, 이건 궁금해서 여쭤보는 것인데 혹시 여기 일하는 식솔들 중에 ‘복순이네’라고 잘 알고 계시는지요?”

복순이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잘 알고말구요. 어찌 물어보시는지요?”

“아니, 그 놈들이 돌아왔답니다.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길래 멀리 쫓아 보내었는데 다시 돌아왔다지 뭡니까?”

“그러시군요. 그래, 그들이 뭘 그리 잘못했답니까?”

“아니 뭐… 제가 하는 일을 얼마나 막아섰는지 모릅니다.”

“그래요? 무슨 일을 하시려 했는데요?”

부자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었습니다.

“그 복순이네 집의 근처 공터에 거름창고를 지어 돈을 좀 벌 궁리였지요.”

“그리하면 그 집에서 역한 냄새 때문에 살기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부자는 복순이네와 있었던 일 때문에 홧김에 변명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돈을 출자한 분에게 대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아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고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그렇지요.”

“아마 복순이네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어르신에게 맞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용서 하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복순이네는 다시 극진한 대접과 함께 부자를 돌려 보냈습니다. 부자는 기분이 좋아 흥얼 거리면서도 자신의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길에 문지기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습니다.

“이보게나, 여기 복순이네가 도대체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

“아니, 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방금 어르신과 함께 걸어나오던 이가 복순이네 아닙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저 높은 어르신을 모욕하지 말게나.”

“제가 어르신과 농을 주고 받겠습니까? 방금 어르신을 모시고 걸어나온 이가 바로 복순이입니다.”

그제서야 부자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지기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부자의 뒤에서 커다란 대문을 다시 닫고 부자를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