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어느 성모상 축복식

어제 성모상 축복식을 가서는 정말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도 시끄러웠고 가져간 확성기도 배터리가 다 나가 버렸거든요. 그래서 정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한 동양 사제가 한길가에서 사람들을 모아다놓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걸 말이지요.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변화 시킵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해 드릴께요. 누가 동전 가지신 분이 있나요? (제 앞의 아줌마가 재빨리 동전 하나를 저에게 줍니다.) 걱정 마세요. 안 훔쳐갈 테니까요. (모두가 웃습니다.) 자, 이 동전을 보세요. 이걸 두살배기 아이에게 주면 그 아이에게 이 동전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저 단단한 조각일 뿐이지요. 왜냐하면 이 아이에게는 돈의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아이에게는 엄마 젖이나 사탕과 같은 것이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돈의 가치라는 것은 어른들이 정해서 거기에 부여한 것이 되지요. 그래서 어른들은 이 금속 조각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돈의 가치’라는 것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상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성모상은 그냥 어느 재료로 만든 상일 뿐이지요. 그 상에 우리가 저마다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모인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는 이 성모상 앞에 모여들면서 성모님의 덕행을 배우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욕구로 이 성모상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

개신교 형제들은 우리 천주교 신자들더러 성모님을 우상숭배한다고 비판하고는 하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사랑하는 거지요. 세상 어느 누구가 위대하신 분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하느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 가장 좋은 그릇을 택하신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도 일리는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 중에서는 때로 성모님을 ‘우상’처럼 받드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지요. 우상이라는 게 뭔지 아십니까? 그건 하느님의 자리에 놓이는 다른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진정한 우상은 다름아닌 ‘돈’입니다. 그러니 돈을 하느님보다 사랑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우상숭배자’들이지요.

성모님 앞에 모여 들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런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고 성모님, 제 가게 돈 좀 벌게 해 주세요.’ 이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우상숭배자인 것입니다. 위선자들!!!!!!(이미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 부분에서 정말 고함을 질렀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걸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이 누구를 돌보실지 말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고통받는 자들, 소외된 자들, 억압받는 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십시니다. 헌데 당신 가게에 돈을 벌게 해 달라는 겁니까? 그럼 당신은 그 돈을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 것입니까? 천만에요. 당신은 당신의 이기심 때문에, 당신의 개인적인 사욕 때문에 돈을 벌게 해 달라는 겁니다. 열손가락이 있는데 칼에 베어 피를 흘리는 새끼 손가락을 돌보지 않고 다른 손가락에 끼울 반지를 준비하는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모두가 소중한 자녀이며 그 가운데 가장 부족한 이를 돌보십니다. 헌데 당신의 개인적인 탐욕을 위해 하느님이 일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고통 당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가장이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오면 아내와 아이들은 고통 당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자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주범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같은 집에 사는 삼촌과 할아버지와 양부입니다. 그 아이들은 매일매일을 지옥같은 두려움에 시달려야 합니다. 헌데도 정신없는 부모들은 어른들이 보아야 할 DVD를 사와서 보고는 그걸 아무렇게나 놓아두어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이 호기심에 돌려보게 하고 그렇게 욕구를 키워 놓습니다.

우리는 가진걸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무엇을 선호하고 받아들이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과연 거룩한 것을 좋아할까요? 천만에요. 성당 앞을 지나가면서 습관적으로 성호나 그을 뿐, 정작 미사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원하는 축복,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축복만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선 집에 가면 늘 돈 때문에 아내와 다투곤 하지요. 우리가 그렇게 빈약한데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 아이들이 커서는 어른들을 공경하고 섬기는 훌륭한 아이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럼 한국은 여기보다 잘 살아서 아주 훌륭하게 살까요? 부유함이 화목함과 바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은 아파트라는 걸 지어서는 옆에 이웃이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한 가족이 저마다의 방에 들어가고 나면 만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적어도 한 방에서 지내잖아요. 좋든 싫든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차라리 나은 셈입니다. 엄마에게 화난 아이들이 하다못해 배가 고파서라도 다시 엄마에게 돌아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국의 잘 사는 집이라면 가정부를 시켜서 ‘내 방에 음식 가져오세요.’라고 하면 언제까지고 떨어져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실컷 벌어서 그렇게 뿔뿔이 흩어져 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 것입니까?

(잠시 멈추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거 아십니까? 하느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기회를 다시 주시지요. 하느님이 무능력해서가 아닙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하고 못난 자라도 하느님은 다시 ‘하루’라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분별하실 때에는 결국 주시던 것을 그칠 것입니다. 하루 하루 지속되던 우리의 삶이 어느 순간에는 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쳐서 다시 원래의 마음을 회복하고 하느님에게 돌아 와서 진정으로 참되고 평화로운 길, 축복으로 가득한 길을 걸으십시오. 하느님에게 돌아 오십시오. 하느님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 서로 사랑하면서 기쁘게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악행을 버리고 과거를 청산하십시오. 그것은 오직 여러분의 결심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에서 아주 이쁜 말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깨끗한 보가 깔린 책상이 있는데 그 옆의 수도꼭지에서 더러운 물이 줄줄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행주를 들고 상을 닦아도 그 수도꼭지에서 줄줄 새어나오는 더러운 물이 곧바로 다시 상을 더럽히고 맙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상을 아무리 닦아낸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가장 먼저는 우리의 그릇된 삶의 형태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상을 닦는 것이 의미가 있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다시 축복 예식을 계속하겠습니다.”

사실 어제 한 모든 말들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여기 적어 놓은 것보다 더 많은 말들을 했지만 핵심 줄기는 대충 이러했습니다. 특히나 거기 모인 이들 가운데에는 주일 미사에는 나오지 않으면서 그 ‘축복식’은 나와 앉아있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극히 일부만이 주일미사에 나올 뿐이지요. 성당이 지척의 거리에 있는데 뭐가 더 중요한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축복식을 마치면서 말을 너무 많이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8시가 조금 넘어서 갔는데 마치니 9시 반이 되었습니다. 성모상 축복식을 거의 한시간 가까이 한 셈이지요. 한 아주머니가 대표로 나서서 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들은 것을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축복식이 끝날 무렵에는 사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라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힘들지만 보람찬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