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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치유에 대해서 제가 아는 바를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치유를 ‘돈’의 가치로 따집니다. 즉, 무슨 수술비는 얼마, 무슨 수술도구는 얼마, 무슨 검사는 얼마의 비용으로 치유의 가치가 산출되지요. 그래서 흔히 부자들이 더 잘 치유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치유라는 것은 돈의 가치가 아닙니다. 치유는 영적인 가치로 살피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보살핀다고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기능들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모든 인간은 ‘노화’의 과정에 있고, 그 외에도 우리가 섭취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통해서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정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건강은 ‘영적인 건강’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육적으로도 건강하게 마련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과음하지 않으며 자신의 육신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돌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으면 자신이 벌어들인 것으로 몸을 혹사시키고 온갖 쾌락에 중독되어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요구되고, 나아가 그런 쾌락 이후에 다가오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 골머리를 앓기 시작하게 되지요. 그런 스트레스들이 결국은 몸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건강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허락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병’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낙원, 즉 파라다이스에 살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몸은 조금씩 망가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고 실제로 몸은 망가져 갑니다. 그렇게 ‘질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질병이 생겼을 때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가늠합니다. 물론 돈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의사’라는 직분으로 사람들을 부르면서 아픈 이들을 돌보게 하셨고, 그 의사들이 자신의 정당한 일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게 허락하셨지요. 그래서 그런 의사들에게 지급할 정당한 비용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어느 가난한 사람이 그 기초적인 보살핌도 받기 힘든 지경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돈’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은 ‘하느님’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 사람을 분별하시고 그의 가치를 가늠하십니다. 병이야 우리 생활의 자연스러운 부분이고 때가 되면 일어나는 일이지만, ‘치유’는 다릅니다. 치유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치유하는 근본 주체는 돈도, 값비싼 의료기구도, 인간의 잔재주도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의 몫입니다. 나머지는 그분의 일을 돕는 수단일 뿐이지요.

이를 모르는 부자들은 자신이 쌓아놓은 것으로 안심하고 하루하루를 즐기며 쾌락에 빠져 삽니다. 그러다가 덜컥 암이라도 걸리게 되면 시한부 선고를 받는 셈이지요. 이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며 가진 것을 다 쏟아붓지만 별다른 차도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의 삶을 보시고 이제는 별다른 가망이 없다는 것을 보셨기에 그의 건강은 이제 물 건너가 버리고 만 셈입니다.

차라리 그 비용들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왔다면 ‘가능성’이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아파 죽을 지경인데 그 와중에 가난한 이들을 떠올리는 부자를 만나본 경험은 없습니다. 저마다 제 살기 바쁘고, 어떻게든 제 한 목숨 구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엔 죽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지요. 좀 심한 경우에는 아주 더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즉, 자녀들의 유산 분쟁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병원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 돈 맛을 본 의사들은 더욱 탐욕스럽게 변해가지요. 하지만 그 와중에 모르는 곳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을 교만한 이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정말 기댈 곳 없는 이들은 하느님 앞에 나아와서 그분의 사랑을 얻어 갑니다. 하느님은 치유하시는 분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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