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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사정회의

때로는 신부님들이 신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곧잘 ‘사정회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일년마다 두 번씩 방학이 되기 전에 신학생 하나 하나를 두고 다음 학기를 계속할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일컫는 말입니다.

신학교 생활을 년수로 치면 7년, 일 년에 두번씩 하니까 총 14번의 사정회의를 거쳐야 신부가 될 수 있기에 사제가 된 이들은 이를 엄청난 시험을 거친 듯이 자랑하여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사정회의라는 것은 회사의 인사회의가 아닙니다. 사정회의라는 것은 특별히 문제가 되는 학생들이 있을 시에 그 안을 꺼내고 여러 교수 신부님들이 마음을 모아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서 가장 적합한 분별을 내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한 신학생이 신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지낸다면 사정회의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술에 쩔고, 타인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표양을 보이고 한다면 마땅히 사정회의가 이루어질 것이고 아마도 그 신학생을 아는 신부님들의 항변이 이어질 것입니다. 결국 사정회의라는 것은 오류가 있는 이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회의이며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려는 회의가 본질입니다. 하지만 여러 교수 신부님들이 안타깝게도 최종적으로 한 신학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그 또한 순명하고 다른 성소를 찾아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많은 신자분들에게 이런 신학교 내부적인 사항은 가리워져 있기에 그저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교는 ‘성인들의 학교’가 아닙니다. 신학교는 양들을 사목할 능력을 갖춘 사목자를 양성하기 위한 곳입니다. 신학생들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사제가 되더라도 완성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정회의가 아니라 매 순간에 하느님의 시선을 눈앞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마주보며 살아가는 인식을 그쳐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간혹 납작 업드려 있던 이들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하기도 합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요. 신학교 시절 자신의 본래적인 면을 감추고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다니다가 신부가 되고 나서 고삐 풀린 존재처럼 나다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성품을 받은 이상 신자들은 그를 존중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관용과 신자들의 사랑을 깨닫고 하루빨리 본래적인 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신자분들은 그의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신학교의 사정회의는 끝났을지라도, 하느님의 사정회의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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