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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련된 금과 은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3,3)

우리는 모두 정련될 것입니다. 금과 은이 뜨겁고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 더욱 순수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시련과 고난의 불을 통과하여 더욱 순수한 믿음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근육의 힘은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훈련’을 통해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단순한 시련과 고난, 고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기에 그들은 이 훈련에서 도피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스승님의 모범을 따릅니다. 그분은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걸어나가셨습니다. 비록 쓰러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주변에서 내미는 도움의 손길(시몬)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로는 베로니카에게 위로를 받으시고 어머니에게 위로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고난 자체가 상쇄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고난의 짐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억지를 써서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고난들을 마련해 두셨고 그 고난들은 이미 우리가 겪어 나가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걱정으로 충분합니다. 내일 일을 오늘 끌어들여 걱정할 필요가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걱정을 만들어서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거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정련되어 훗날 하늘 나라에서 모일 때의 기쁨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나라에는 더는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더는 분노도, 시기도, 증오도, 악의도 없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 약속의 땅을 분명히 선언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기에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가십시오. 서두르다가 넘어질까 걱정됩니다. 하지만 행여 넘어 지더라도 우리 주님의 이름을 잊지 말고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의 목자이신 그분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사방을 헤메고 다니는 분이시니 당신이 부르짖으면 여지없이 달려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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