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특징을 드러내지요. 죽은 이는 수동적입니다.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지요.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다가옵니다. 세상이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이리 오라 하면 이리 오는 이들입니다.
새로나온 신상품이 좋다 하면 인터넷을 뒤지고 관련 정보를 찾고 없던 호기심도 발동시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무엇이 건강에 좋다고 하면 또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캐냅니다. 사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필요해서 찾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지요.
반면 자신의 내면에 대해 무지한 편입니다. 툭하면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는데 정작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곧잘 남 탓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를 행한 ‘주체’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날씨 탓이고, 그의 탓이고, 하느님 탓이고 세상 탓입니다. 그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없지요. 즉,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수동적입니다. 신앙생활을 세속생활 하듯이 합니다. 무슨 기도가 좋다고 하면 그걸 해보다가 금세 지쳐 버리고, 또 다른 게 좋다고 하면 그걸 따라다니다가 흥미를 잃고… 이런 식입니다. 정말 하느님에 대해서 그 사랑을 느끼거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다니는 것을 찾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불을 지피는 분이 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릴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이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살려는 이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고 예수님은 영적으로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하지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문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아닙니다. ‘만나고 싶은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 근본 원의가 없으면 예수님이 코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 근본 원의가 있으면 상당히 다양한 곳에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도 있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할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맡기셨지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병도 고쳐주고, 가르치기도 하고, 밥도 나눠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길을 찾아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찾기 쉽게 도와주는 역할이 교회의 역할이고, 그렇게 다가온 이들을 예수님의 절친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들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 복지 사업가도 아니요, 단순한 비영리 병원도 아닙니다. 교회는 인도자, 길잡이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일꾼들이 절실합니다. 누가 그 일꾼이 되어야 하느냐구요? 사제? 수도자?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새로나온 신상품이 좋다 하면 인터넷을 뒤지고 관련 정보를 찾고 없던 호기심도 발동시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무엇이 건강에 좋다고 하면 또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캐냅니다. 사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필요해서 찾는 게 아닙니다. 세상이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지요.
반면 자신의 내면에 대해 무지한 편입니다. 툭하면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는데 정작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곧잘 남 탓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언가를 행한 ‘주체’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날씨 탓이고, 그의 탓이고, 하느님 탓이고 세상 탓입니다. 그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없지요. 즉, 생명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에서도 수동적입니다. 신앙생활을 세속생활 하듯이 합니다. 무슨 기도가 좋다고 하면 그걸 해보다가 금세 지쳐 버리고, 또 다른 게 좋다고 하면 그걸 따라다니다가 흥미를 잃고… 이런 식입니다. 정말 하느님에 대해서 그 사랑을 느끼거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 다니는 것을 찾을 뿐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불을 지피는 분이 있습니다. 죽은 이를 살릴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이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살려는 이는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고 예수님은 영적으로 병들고 나약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하지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문제는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것인가가 아닙니다. ‘만나고 싶은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 근본 원의가 없으면 예수님이 코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 근본 원의가 있으면 상당히 다양한 곳에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도 있지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길잡이’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할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맡기셨지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 병도 고쳐주고, 가르치기도 하고, 밥도 나눠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길을 찾아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이지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찾기 쉽게 도와주는 역할이 교회의 역할이고, 그렇게 다가온 이들을 예수님의 절친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이 목적을 위한 부수적인 수단들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 복지 사업가도 아니요, 단순한 비영리 병원도 아닙니다. 교회는 인도자, 길잡이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일꾼들이 절실합니다. 누가 그 일꾼이 되어야 하느냐구요? 사제? 수도자?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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